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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최후의 격전지 공주 우금티전적지

침략자 일본에 맞서 싸운 패맺힌 절규

2020.12.19(토) 07:37:07유리향(dried12@naver.com)

공주는 백제의 유적지이자 세계유산도시로 널리 알려졌지만, 평등한 세상을 외치다가 희생당한 동학농민운동 최후의 격전지가 공주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4월 25일,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전봉준의 주도 하에 봉기한 역사적인 사건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빌미로 하여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고, 일본군이 침략하여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게 되고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을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지요. 

이에 전봉준은 다시 나라를 구할 목적으로 수만 명의 병력을 모아 삼례를 출발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 공주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대규모의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때가 지금부터 126년 전인 1894년 음력 11월이니, 양력으로는 아마도 한겨울인 12월이었을 것 같아요. 찬바람 몰아치던 공주 우금티(우금치) 계곡은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어서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우금티전투라고 합니다.
 

 
우금티전적지에는 올해에 새로 알림터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월요일이 휴무일이라고 문을 닫아서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우금티전적지는 공주시 금학동에서 이인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습니다. 공주에서 우금티터널을 통과하기 전에 바로 전에 진입로가 있으니 이곳을 통과하면 안 됩니다.
 

 
안내판에는 우금티가 아닌 '우금치' 전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금티와 우금치가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곳 공주 사람 대부분은 이곳을 우금티라고 부른다고 해요. 그런데 정식 명칭은 '우금치전적지'라고 문화재청에 등록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원래 우금티는 옛날에 소를 끌고 이 고개를 넘다가 도둑들에게 빼앗기는 일이 많아서, 소를 끌고 가지 말라고 '우금치(牛金峙)'라고도 불렀다 합니다. 그런데 '치'는 높은 고개를 뜻하는 우리말 '티'와 발음이 비슷한 산 우뚝할 '치(峙)'로 대치된 것이라고 해요. '우금치'든 '우금티'든 한 가지로 통일이 되었으면 혼동이 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우금티전적지로 통일하여 사용하겠습니다.
 

 
우금티전적지에는 제법 큰 주차장이 있고 너른 화단 모양의 구획들이 산책로처럼 되어 있습니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우뚝 솟은 위령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금티전적지 한가운데에는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동학농민군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건립되었으며, 탑의 전·후면에 위령탑에 대한 설명과 도움을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동안 이념 갈등에 의하여 비문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으나, 1994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내건 동학농민군의 최후의 격전지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견준산을 중심으로 한 5만 1896㎡가 사적 제3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우금티전적지 곳곳에 돌로 쌓은 원형 모양의 탑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쌓은 것 같습니다.
 
약 3만에 이르는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8일, 승승장구하면서 공주 우금티고개를 넘게 됩니다. 이 일대에서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과 관군의 공격에 맞서 수십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크게 패하고 대부분 전사했다고 해요. 견준산 일대에 시체가 넘쳐나고 그들이 흘린 피가 계곡을 따라 철철 흘러내릴 정도였다고 하니, 몸서리가 쳐집니다.
 

 
이곳에는 봉화대 모양의 기념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사방으로 나 있는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보면 하늘을 향해 둥근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동학농민들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일본군을 몰아내려다가 희생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령탑의 좌측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우금티고개를 넘어가 봅니다.
 

 
우금티고개 아래에는 우금티터널이 있고 그 위에는 너른 터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 고개를 넘어야 공주로 진입할 수 있었겠지요.
 

 
우금티고개에는 농민단체가 만들어 놓은 낡은 장승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해학적인 표정의 장승들이 살기 좋은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소나무숲 사이로 넘어가며 환상적인 세상을 만듭니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들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평등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나가려고 봉기하였으나 이곳 공주 우금티에서 그 뜻을 펴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뜻을 이어받아서 나라를 되찾고 그들이 원하던 인간 중심의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찬바람 몰아치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맞서 구국운동을 펼치다 장렬하게 돌아가신 동학농민혁명군들의 넋을 추모하는 공주 우금티전적지를 돌아보며 그분들의 높은 뜻을 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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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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