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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완성은 부여 성흥산 사랑나무와 3대 거목 아래에서

부여 성흥산의 사랑나무와 3대 거목 이야기

2020.12.14(월) 11:28:41충화댁(och0290@hanmail.net)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은 백제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토성과 돌로 쌓은 산성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성흥산은 적진에서 기어다니는 개미도 보일 것 같은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고작 해발 250m이지만 성흥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확 트인 전망이 시원스러운 곳이다.
  
성흥산의 전망. 커플들은 적진의 개미까지 다 보일정도로 확 트인 전망에도 반한다.
▲성흥산 정상에서의 전망, 커플들은 적진의 개미까지 다 보일 정도로 확 트인 전망에도 반한다 
  
최근 성흥산이 유명해진 것은 산 정상에 외롭게 서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수령 50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 서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인기 드라마 촬영지가 되었다. 나무의 실제 모습도 아름답지만 영상으로 표현했을 때 더 환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극이나 환타지 멜로 드라마의 주요 배경으로 뜨고 있다. 연륜의 향기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듯이 수령이 오랜 나무들이 주는 위안이 사람들을 찾게 한다.
 

  
나무의 오른쪽 가지가 하트 모양으로 뻗어 있어서 나무의 원래 이름 대신에 ‘사랑나무’라는 애칭이 붙었다. ‘성흥산 사랑나무’라고 불려지면서 부터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은 젊은 연인들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사랑을 약속한 연인들과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사진을 올리고 퍼나르는 곳이 되었다.
 

  

 
원래 부여는 '서동요'라는 향가의 유래가 되었던 서동과 선화 공주의 사랑이야기가 배경으로 깔리는 곳이다. 고대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던 신라의 공주 선화와 백제의 왕자인 서동이 해피엔딩 사랑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런 설화를 바탕으로 2005년에는 사극 '서동요'가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그때 서동과 선화의 사랑의 테마가 흘러나오며 배경이 된 곳이 성흥산 사랑나무이다.
  
오른쪽 가지가 하트 모양이라 '사랑나무'라는 애칭이 붙었다
▲오른쪽 가지가 하트 모양이라 '사랑나무'라는 애칭이 붙었다
 
  
성흥산에는 이 사랑나무 외에 두 그루의 거목이 더 있다. 이름을 붙이자면 성흥산의 3대 거목이다. 이 성흥산의 3대 거목은 원주민들만 안다. 사랑나무의 유명세에 가려 빛을 못 보는 노거수들이지만 배경 전설로 보아서나 자태로 보아서나 빠지지 않는 위용을 자랑한다. 성흥산에 찾아오는 사랑을 약속한 커플들은 이 세 그루의 노거수를 다 만나봐야 사랑이 완성된다.
 

 
성흥산 사랑나무로 오르는 중간쯤 성흥산 대조사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대조사에는 거인 같은 미륵불이 천년 세월을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서 있다. 우리가 찾는 거목은 바로 그 미륵불의 머리를 우산처럼 씌워주고 있는 소나무이다. 미륵부처와 소나무는 사이좋은 커플처럼 천년의 사랑을 이어가는 중이다.
 
미륵불 옆의 바위의 틈을 뚫고 자라난 소나무는 오로지 미륵불 쪽으로만 가지를 뻗었다. 대조사 미륵불을 사수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소나무이다. 이런 소나무의 일념과 미륵불의 중생 구제의 신념이 한마음으로 담긴 곳이다. 종교적인 의식을 초월해, 사랑을 약속한 'Z세대'의 연인들은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풍상을 겪으며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내기란 굳은 결의가 아니면 어렵다. 그 어려운 사랑을 시작하고 헤쳐나가야 할 연인들이 닮은꼴로 본받아야 할 존재들이 바로 대조사 미륵불과 소나무이다. 이런 스토리텔링을 배경으로 대조사를 찾으면 그저 문화재로만 보였던 미륵불과 소나무의 모습이 한층 정감있게 보인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선생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에서 ‘대조사 석조보살상 옆 바위틈에서 자란 노송이 있어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하고 마음을 더욱 빼앗고 보살의 광배인 양 머리 뒤를 받쳐주고 있어 신비로운 마음이 일어날 정도‘라고 썼다.
  

 
시골마을 입구에는 장구한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거대한 고목들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도보 통행만 가능했던 시절 그 정자나무들은 여행자들의 이정표가 되기도 했고 쉬어가는 곳이 되기도 했다.

임천 관아터 소나무도 320여 년 전 조선시대에는 임천의 랜드마크로 남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흥산성으로 올라가는 초입에는 임천면 행정복지센터가 있다. 조선시대에도 그곳은 임천군의 행정업무를 맡았던 관아가 있던 곳이다. 임천관아의 정원수로 누군가 심었던 것이 320여 년을 장수하다 보니 관아의 흥망성쇠는 물론 조선과 대한제국, 오늘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온갖 굴곡을 다 지켜본 소나무가 되었다.
  

  
이 소나무는 보통 소나무와 다르게 가지가 옆으로 늘어지면서 뻗어가는 소나무이다. 그러다 보니 가지를 받쳐줄 지지대가 필요했다. 옆으로 늘어진 가지마다 지지대로 고정시켜서 보호하는 중이다. 언뜻 보면 목발을 짚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자태를 보면 아름답게 잘 자란 거목이다.
  

  
조선시대 임천군수로 부임했던 심노숭의 업적을 기린 비석.
▲조선시대 임천군수로 부임했던 심노숭의 업적을 기린 비석
  
조선시대 임천군 군수였던 심노숭((1762~1837)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의 마지막 임지였던 임천에서 유례없는 풍년이 들었던 1824년 군민들과 뜻을 모아서 관아의 문루와 객사를 다시 짓는 업적을 남겼다.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가 남긴 시에는 조선 최고의 애처가이며 로맨티스였던 풍모가 엿보인다. 잠이 오지 않는 밤, 그도 그 당시에는 수령 백년쯤 된 그 소나무 아래를 거닐었을 것이다. 먼저 간 아내와, 군의 살림을 이끌어가는 수장으로서의 무게를 그 가지 많은 소나무에 걸린 달을 바라보며 고뇌했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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