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의 한복판인 1월 중순, 충남 당진으로 향했습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 묘한 설렘이 감돕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일제강점기, 펜 하나로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농촌 계몽을 꿈꿨던 심훈 선생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 때문이죠.

평일 오후라 그런지 주차장은 여유로웠습니다. 차를 세우고 고개를 드니, 기념관 입구에서 책을 꼭 쥔 채 어딘가를 응시하는 심훈 선생의 동상이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그 옆으로 벽면에 새겨진 시, <그날이 오면>의 구절들이 시선에 박힙니다.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독립을 향한 그 처절한 갈망이 활자 밖으로 튀어나올 듯 생생합니다.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짐을 느끼며, 저는 역사의 깊은 곳으로 향하듯 계단을 내려가 기념관 내부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시대의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하다, 심훈기념관

기념관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심훈문학대상' 수상 작가들의 이름입니다. 심훈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 상은, 2014년 제1회 수상자인 조정래 작가를 시작으로 고은, 바오닌, 신경림, 이근배, 황석영, 김중혁, 정지아, 장류진, 장강명, 정한아 작가 등 한국 문단을 이끄는 기라성 같은 이름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문인들이 이곳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조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시관 안쪽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인간 심훈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1. 뜨거운 피를 가진 청년, 3.1운동과 수감 생활
심훈 선생은 책상 앞에 앉아 글만 쓰는 문인이 아니었습니다. 1919년, 경성고보 재학 시절 그는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전시관에는 그가 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차가운 감방 바닥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그의 독립 의지와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효심이 읽는 이의 눈시울을 붉게 만듭니다.

2. 펜을 든 투사, 언론인 심훈
출소 후 그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일제의 검열과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펜을 무기 삼아 진실을 알리려 노력했죠. 영화, 소설, 시, 평론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시대를 선도하는 지식인이었던 그의 면모를 이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3. 당진, 그리고 상록수
그렇다면 왜 당진일까요?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부친이 계시던 이곳 당진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의 대표작이자 농촌 계몽 소설인 <상록수>를 집필하게 됩니다. 전시관에는 소설의 모티프가 된 실제 인물들과 당시 농촌 계몽 운동의 생생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소설 속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특히 그의 대표 시 <그날이 오면>이 전시된 공간에서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겠노라"던 그 절절한 외침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푸른 소나무 숲과 필경사의 고즈넉함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실내와는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설 <상록수>에도 등장하는 전나무, 향나무, 사철나무, 소나무 등 4종의 상록수가 어우러진 숲이 저를 반깁니다. 1월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이 나무들은 마치 심훈 선생의 꼿꼿한 절개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소나무 숲 뒤편으로는 '상록수 문화관'이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 아담하고 단정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필경사(筆耕舍)입니다.

'붓으로 밭을 일구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필경사는 심훈 선생이 1934년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1935년 소설 <상록수>를 집필했습니다. 초가지붕의 집은 서양식 구조와 한옥의 미가 조화롭게 섞여 있어 건축학적으로도 독특한 매력을 풍깁니다.

필경사를 마주보고 섰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내려와 필경사를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선생은 이 작은 방에서 밤을 지새우며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고, 희망을 써 내려갔겠지요.

필경사 앞마당에는 벤치에 앉아 책을 든 심훈 선생의 조형물과 철로 만들어진 상록수 조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마치 지금도 이곳을 찾은 우리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라고 말을 건네는 것만 같습니다. 저도 그 옆에 잠시 앉아, 그가 꿈꾸었던 '그날'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겨울에도 지지 않는 푸른 정신을 담아오다
당진 필경사와 심훈기념관은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지식인의 고뇌와 열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 추천 포인트: 아이들에게는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 어른들에게는 잊고 지낸 애국심과 문학적 감성을 채워줄 힐링의 장소입니다.
▷ 여행 팁: 실내 기념관이 잘 되어 있어 1월 같은 추운 겨울철 나들이 장소로 제격입니다. 관람 후에는 필경사 앞에서 고즈넉한 풍경과 함께 인증샷을 남겨보세요.
붓으로 희망의 밭을 일구었던 심훈 선생. 그의 숨결이 서린 이곳에서, 여러분도 마음속에 '푸른 상록수' 한 그루 심어오시는 건 어떨까요? 올겨울, 충남 당진으로의 의미 있는 발걸음을 추천합니다.
당진 심훈기념관
○ 장소: 충남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105
○ 문의: 041-360-6883
○ 운영시간 : 화~일 09:00~17:00, 정기휴무 월요일
○ 관람료 : 무료
○ 주차비 : 무료
* 취재(방문)일 : 2026년 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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