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2학기부터 사회시간에 역사를 배운다고 하여 방학동안 함께 한국사를 공부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백제를 살펴보면서 가까이 있는 공주, 부여에 남아있는 백제의 흔적을 실제 살펴보고 오자고 약속했고,
이번에는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다녀 왔습니다.


공주에서도 백제문화제 축제가 한창이라 사람이 많을거라고 예상하고 갔는데 비가와서인지 무령왕릉 주차장은 만차였지만 들어가는 입구는 한적 했습니다.
원래는 입장료가 있는데 백제문화제 축제기간동안 무령왕릉과 왕릉원, 공산성의 입장료가 무료라는 사실을 방문해서 알았습니다.

매표소를 지나면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이 나옵니다. 비도 오고 내부가 보이지 않아서 몇몇분들도 들어가도 되는지 망설이시다 들어갔는데 입구라는 표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령왕릉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문화해설사님께서 해설을 해주십니다. 점심시간은 12시부터 13시 이므로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오후 4시 설명을 들으며 전시관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분이란 죽은 사람을 땅 속에 묻기 위해 만든 시설물, 즉 무덤을 의미하고,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덤을 기념물로 여기게 되면서 시대와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덤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과 죽은 이에 대한 엄격한 의례가 담겨 있어, 그 시대의 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매우 가치있는 문화 유산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에 의해 우리 고분들이 파헤쳐지고 문화재들을 약탈해 갔는데 이때 1호분부터 6호분까지 발굴이 되고 1963년 송산리 고분군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71년 고분군 배수로 공사중 무령왕릉 입구를 발견하게 되었고, 발굴 조사가 실시 되었습니다.
1985년 무령왕릉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으나 이후 고분의 내부 보존환경 및 구조적인 문제가 발견되어 1997년 내부관람을 중단하고 영구폐쇄 되었다고 합니다. 2003년 송산리 고분군 모형 전시관을 개관하고,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에 등재 되었습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 웅진기 대표적인 왕과 왕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도굴과 발굴조사에 의해 그 존재를 알렸으나 조사기록이 적어 그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고, 일제강점기의 각종 자료를 보면약 20여기 이상의 고분이 확인되지만 현재는 발굴된 고분 7기만 정비·복원 되어 있다고 합니다.
구릉 윗부분에는 1~4호분이, 그 남쪽 사면에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자리하며, 고분의 구조는 크게 한성기 전통을 이어받은 돔 형태 천장의 굴식돌방무덤(1~5호분)과 새로이 중국 남조로부터 수용한 벽돌무덤(6호분. 무령왕릉)으로 구분 됩니다.

한성기의 무덤은 가락동·방이동 고분군과 석촌동 4호분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데 초기 백제고분군으로 돌무지무덤, 돌무지널무덤, 돌덧널무덤, 움무덤 등 다양한 무덤이 확인되었습니다. 돌무지무덤은 다듬어진 깬돌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고분으로 고구려 돌무지무덤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내부를 점토로 채우고, 겉부분만 돌로 시설하여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차이가 있는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불립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5호분은 산 능선에 등고선 방향과 직각으로 구덩이를 파고, 널방과 널길을 조성한 굴식돌방무덤으로 한성말기에 백제 왕실 묘제로 정착했던 것으로 보이며, 웅진으로 천도하여 백제왕릉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무령왕릉과 왕비의 능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6호분, 교촌리 3호분 등을 중심으로 공주지역에서만 한정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사비기 시기는 익산 쌍릉과 부여 왕릉원 1호분(동하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웅진기 굴식돌방무덤과 달리 대형이 판석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만든 굴식돌방무덤입니다. 널방의 4벽면은 판석 1개씩을 사용하여 수직벽을 세우고, 천정 역시 거대한 1개의 판석을 덮어 완성하여 단면 육각형의 납작천장식 돌방무덤으로 불리며, 널방의 4벽면에는 사신도, 천장에는 연꽃과 구름이 흐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5호분 안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돌방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추가장을 할 수 있다는 점으로, 널방을 만들고 사람이 출입할 수 있도록 무덤의 한쪽에 진입로와 입구를 만든 개방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5, 6호분은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으로 그 재료는 다르지만 무덤의 구조는 널길이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6호분 내부 입니다. 벽돌무덤은 중국 한나라때부터 위진남북조에 이르는 시기까지 주로 사용하던 무덤으로 6호분과 무령왕릉이 조성될 당시에는 남조 양나라의 지배층이 사용하던 양식입니다.
웅진시대 벽돌무덤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던 백제 사회의 국제성, 개방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6호분은 네 벽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나 일제강점기 도굴 등으로 인해 유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무덤의 주인을 지키는 사신도는 동쪽-청룡, 서쪽-백호, 남쪽-주작, 북쪽-현무로 우주의 질서를 수호하는 신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무령왕릉 입니다. 학창시절 역사를 배울 때 이 벽돌 무늬를 꼭 와서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보게 되었고, 그 때의 감정이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5호분과 6호분은 여름이 되면 무덤안에 물기가 새거나 습기가 차 무덤의 손상이 심해 1971년 6월 말부터 6호분 봉토 북쪽으롤 배수 시설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배수구를 만들기 위해 봉토의 일부를 파 들어가던 중 가지런히 쌓은 벽돌들이 나타나자 즉시 공사는 중단되었고, 문화재관리국에 알려 새로운 무덤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발굴조사단은 본격적인 조사에 앞서 무덤 주인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널문을 막았던 맨 위의 벽돌 한 장을 처음 빼냈을 때, 무덤속에서부터 하얀 김이 서려 빠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문이 열리고 처음 맞이 한 것은 진묘수라는 뿔과 날개가 달린 상상의 동물로, 무덤을 지키고 죽은 자의 영혼을 신선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도교적 세계관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또 무령왕릉에서는 총 2매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는데 무령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과 왕비의 묘지로 구성되어 있고, 국보 163호 지정되었습니다. 묘지석의 기록으로 인해 무령왕릉은 삼국시대의 왕릉 중 무덤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시관 밖으로 나와서 실제 왕릉과 왕릉원을 둘러 보았습니다. 문화재를 보호 하기 위해 폐쇄를 하는 것이 맞지만 폐쇄되기 전에 실물을 직접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왕릉원은 백제 시대의 사후공간이라면 공산성은 살아계실 때의 공간이라고 하셔서 공산성도 가고 싶었지만 비도 오고 다들 오전부터 강행군을 한탓에 공산성은 다음을 기약 하였고, 공주 박물관에 실제 진묘수와 묘지석이 보관 되어 있다고 하여 실물을 보고 일정을 마무리 하기로 하였습니다.

진묘수를 보러 가는길은 무지개와 함께 하였습니다. 무지개가 역사 탐방의 의미를 더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습니다.

실물로 맞이한 진묘수는 긴 세월이 무색하게 잘 보존 되어 있었고 엄숙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령왕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묘지석의 발견이라고 하셔서 묘지석도 살펴보고 왔습니다.
학창시절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달달 외우기만 했지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 느껴 볼 시간이 없었는데,
어른이 되어 역사를 공부하고 설명을 듣다보니 마음이 뭉클한 순간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는 유럽의 문화유산 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는데
좋은 학교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 나라를 지키고 보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 역사 공부를 더 활성화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또 아직 가본 곳 보다 못 가본 곳이 더 많아 분발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
○ 위치 : 충남 공주시 왕릉로 37
○ 운영 : 매일 하절기(3~10월) 09:00 - 18:00
동절기(11~2월) 09:00 - 17:00
○ 입장료 : 성인 30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어린이 1000원
(통합권 운영 및 감면 대상 서류 지참이 필요함)
○ 문의 : 041-856-3151
○ 방문일시 : 2024. 10.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