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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청렴의 상징, 죽어 민중의 수호신 '최영 장군'

황금 보기를 돌같이…충남 홍성의 대표 역사인물

2020.01.15(수) 23:40:19장군바라기(hao0219@hanmail.net)

충남 홍성군
▲충남 홍성군 홍북읍 대인리 최영장군 사당 '기봉사(奇峯祠)'

홍성을 비롯한 내포지역은 예로부터 충절의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고장입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충절의 고장 충남’대신 ‘충절의 고장 내포’라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청렴을 강조한 고려 마지막 충신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은 홍성을 대표하는 역사인물입니다.
 
고려사 열전에서도 최영 장군의 성품을 평가하면서 '강직하고 충실하며 청렴하다'라며 '지위가 재상과 장군을 겸했지만 간혹 식량이 떨어질 때도 있을 정도'라고 여러 차례 그의 청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살아 고려인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청렴의 상징이었으며, 죽어서는 민중이 소망을 비는 수호신으로 남았습니다.
 
기봉사에 모셔진 최영장군 영정.
▲기봉사에 모셔진 최영 장군 영정 
  
최영 장군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얻은 것은 청렴함과 당시 고려사회 특히 충남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왜구의 난동을 격퇴시켰기 때문입니다. 고려 말 왜구에 대한 통계에 따르면 충남은 78회에 걸쳐 38개 지역을 침입당했습니다. 이는 침입 횟수는 경남(97회)에 이어 두 번째지만, 침입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많았습니다.
 
왜구의 규모는 많은 때 400척 이상 대선단으로, 해안뿐 아니라 하천으로 내륙 깊숙이 침입해 노략질과 인신납치를 일삼아 피해는 상상 이상 광범위하고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이같은 왜구를 상대로 충청권을 지켜내 수도를 방어한 것은 최영 장군이었습니다. 왜구들은 1376년 금강을 거슬러 부여, 석성을 거쳐 공주를 함락시키고 연산 개태사를 도륙했지만, 최영 장군에게 홍산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돼 더 이상 고려에 대규모 침략을 못하게 됩니다.
 
최영 장군 생가터 위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청도읍지 ‘홍주목’에서는 현재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 적동마을로 밝히고 있습니다. 노은리는 충남도청이 새로 들어선 내포신도시와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최영장군과 관련된 구전이 홍성지역 여러 곳에서 전해오고 있습니다.
 
최영장군 사당인 '기봉사'
▲최영 장군 사당 '기봉사' 전경 1
 
최영장군 사당 '기봉사' 2.
▲최영장군 사당 '기봉사' 전경 2
 
기봉사
▲최영장군 사당 '기봉사' 전경 3
 
최영장군 사당 '기봉사' 처마 단청.
▲최영장군 사당 '기봉사' 처마 단청
 
최영장군 사당 '기봉사'를 오르는 돌계단.
▲최영 장군 사당 '기봉사' 돌계단, 마치 성벽을 오르는 듯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홍성 금마면 철마산(鐵馬山)은 장군이 말을 타고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노은리의 작은 우물터는 지금도 마을 사람들에게 ‘최영 장군 우물터’로 불리고 있습니다. 홍북읍 노은리 삼봉산 정상에는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홍성 용봉산에도 최영 장군의 설화가 전해집니다.   
 
최영장군 우물터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 '최영 장군 우물터'

최영 장군의 사당은 현재 홍성군 홍북읍 대인리 닭제산 정상 인근 비탈면에 돌담을 이용해 터를 내 1995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내부에는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사당까지 차량을 이용하기는 어려우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 300m 정도의 언덕을 올라야 하는데, 경사면이 가팔라 눈비가 오면 주의해야 합니다.
 
최영장군
▲최영 장군의 사당 '기봉사'로 오르는 길 1
 
최영장군의 사당인 기봉사로 올라가는길 1.
▲최영 장군의 사당 '기봉사'로 오르는 길 2
 
공민왕 이후 고려정권의 핵심이었던 최영 장군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실각돼 참수되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데, 최영 장군은 처형에 앞서 "내가 평생에 탐욕의 마음을 가졌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처럼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으로 불렸는데 1970년대부터 풀이 돋아 현재는 무성해졌다고 합니다. 600여 년 만에 그의 억울함과 노여움이 풀려서일까요? 
 
고양시 고양시청 제공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최영장군 무덤, 앞이 최영 장군 뒤편은 아버지 최원직의 묘(고양시청 제공)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우고 6년 만에 최영 장군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넋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비록 정적이었지만 최영 장군의 충절과 청렴함에 깊은 존경심을 보여준 것이라 할 것입니다. 홍성군에서는 1995년 제1회 최영 장군 ‘영신제’를 비롯해 해마다 역사인물축제를 통해 장군의 충의와 공덕을 기리고 있습니다.
 
▲ 홍성 역사인물 최영장군 캐릭터. 홍성군 서부면 죽도의 전망대에 설치.
▲홍성 역사인물 최영장군 캐릭터, 홍성군 서부면 죽도의 전망대에 설치
 
왜구를 물리치고 고려왕실을 보호했지만 억울하게 참수된 최영 장군은 영력으로도 많은 민중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무속신앙에서는 최영 장군을 모시고 소망을 비는 곳이 유난히 많습니다. 마치 중국의 ‘관우’와 같이 사후 '수호신' 내지는 흠모의 대상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서는 청렴의 상징이요, 죽어서는 민중의 수호신이 된 최영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홍성으로의 역사여행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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