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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피어나는 천년고찰 수덕사

2019.09.23(월) 16:29:08도희(ass1379@hanmail.net)

 
지난 주말 서울 여행사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천년고찰 수덕사를 찾았다. 여름내 울창하던 수목들이 조금씩 가을빛으로 물들고 있다. 수덕사 일주문에 걸려 있는 '덕숭산 수덕사' 현판은 호남 제일의 명필가이며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자인 소전 손재형 선생이 쓴 현판이다. 해서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기암괴석으로 아름다운 덕숭산의 이름을 붙였다. 일주문 뒤에 걸려 있는 '동방제일 선원' 글귀는 이 사찰이 동방에서 제일가는 선원이라는 뜻으로 참선을 하는 절로 알려져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좌측 나지막한 언덕에 초가지붕으로 이은 수덕여관이 있다.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된 이곳은 오래 전에는 고암 이응노 화백의 첫째 부인 박귀희 여사께서 직접 숙박업을 했었다. 프랑스 파리로 예술 활동을 하러 건너간 남편을 평생 기다리며 꿋꿋하게 살았던 여인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이 우물은 당시 숙박을 하는 손님들을 식사 준비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이다.
 

 
고암 이응노 화백은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후에 부인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곳 너럭바위 위에 시대의 암울했던 한 예술가의 혼이 서린 추상 암각문자화를 바위에 새겼다.
  

 
자유를 갈망하는 예술가의 외침이 담겨 있는 듯한 바위의 추상 암각화를 감상하노라면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고암은 이 작품을 남기고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예술의 혼을 불태우다가 여든살 국내 개인전 한 달을 앞두고 외국에서 85세로 마지막 숨을 거둔다.
 

 

 
가을로 접어드는 수덕사 길목에 그리움의 상징인 상사화가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다.
 
 

   

 
이곳 환희대는 우리나라 최초 유학생이자 신여성으로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던 일엽 스님(김연주)이 수행했던 사찰이다. 그의 아들 일당 스님 또한 어머니를 따라 이곳 수덕사에서 수도 정진하셨다. 가을이 오는 계절에 수덕사는 근현대사에 빛나는 예술가들과 시대를 살다간 민초들의 애잔한 이야기들이 서려 있는 곳이다.
 

 
황하정루는 부처님의 정신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뜻으로 지붕 아래는 '선지종찰 수덕사' 현판이 걸려 있다. 참선을 종주로 하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임구에 쓰여진 '덕숭총림'은 선원과 강원을 갖춘 곳이라는 뜻이다. 황하정루는 익공구조로 1고주 9량집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건물이다. 이 누각의 지하는 근역성보박물관, 지상 일층은 사무실, 이층은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층계 옆 화강암에 새겨진 '대해탈장'은 번뇌와 미혹의 괴로움에서 크게 벗어나 편안함을 주는 곳이라는 뜻이다.
 

 
덕숭총림 수덕사는 숭유억불정책의 조선조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선의 중흥을 일으킨 경허선사와 선맥을 이은 그의 제자 만공 스님이 있다. 1930년대에 만공 스님은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 제일선원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는 선원을 설립하셨다. 그 수계자 일호가 바로 수덕사 여승의 노래 주인공인 일엽 스님이다. 수행정진을 강조하는 선지종찰 수덕사는 참선을 하는 템플스테이로도 유명하다.
 

 
▲수덕사 경내에 있는 대웅전과 청련당, 그리고 백련당 
 
▲수덕사 대웅전 앞에 있는 약수
 
▲수덕사 조인정사 
 
▲화강암 조각작품명 오줌싸게
 
▲수덕사 산문
 

 
수덕사 입구에는 전국에서 유명한 예산8미 중 하나인 수덕사 산채더덕 정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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