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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철확에 마음길이 닿다

고려 왕실사찰이었던 논산 개태사(開泰寺)

2019.09.05(목) 11:39:16황토(enikesa@hanmail.net)



 
주말에 지인의 자제 결혼식이 있어서 논산에 가게 되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결혼 관련해서 별 말이 없었는데, 청첩장이 날아왔다. 서둘러 날짜를 잡게 된 사연이 있긴 했다. 살다 보면 어떤 상황이 내 일이 될지는 정말 모른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하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를 나와 내 이웃에서 본다. 인생이 어디 생각한 대로만 살아지던가.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살아갈수록 실감나며 그래서 겸손하게 중용을 지키며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또 배운다.
 

 
개태사입구
▲개태사 입구에 있는 주차장
 

 

 

 

 

 

 

 

▲5층석탑 왼쪽 아래 소망의 촛불이 켜 있다.  
 
결혼식에 다녀오면서 논산의 개태사를 들렀다.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절은 ‘936년 고려 태조 왕건이 천호산 아래 황산벌에서 치열한 전쟁 끝에 후백제군을 정벌하여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후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기념으로 창건된 사찰’이라고 한다. 절 입구에 들어서니 ‘천운지’라는 연못에 수련이 피고 옹기수반엔 동전을 던지는 중생들의 마음이 읽힌다. 수능을 앞두고 백일기도로 집중하는 부모들의 바람과 기와에 소망을 적은 글들 모두에 애틋함이 묻어난다. 
  

 

 

 

 
철확
▲철확
 

▲테두리가 떨어져 나간 철확
 

 

 
절 한켠에 모인 여러 항아리를 지키고 있는 듯한 백일홍이 사찰과 참 잘어울렸다. 계단을 오르니 ‘민속자료 제1호 개태사 철확’이라고 비석에 새겨진 글이 눈에 띄었다. 철확은 무쇠로 된 다리가 없는 솥이다. 철확에 대한 글은 아래와 같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직후 세운 개태사에서 사용했다고 전하는 커다란 무쇠솥이다. 사찰의 창건 당시 주방에서 사용했다고 하며, 이후 개태사가 폐허가 되자 벌판에 버려졌다가 조선 고종 24년(1887년)의 정해년 대홍수로 약 2km 정도 하류로 떠내려 온 것을 근래에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이 솥은 가뭄 때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내리며, 수해를 막아줄 뿐만 아니라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직경은 289cm이고, 높이는 96cm이며 두께는 910cm이다. 형태는 마치 테두리가 없는 벙거지형 모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다. …(중략)…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과 여지도서(與地圖書)의 기록에 따르면 된장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였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온전히 둥글었을 철확의 테두리가 군데군데 떨어져나갔다. 크기를 보니 입이 벌어진다. 그곳에 스님들의 밥을 짓고 된장을 끓였다고 생각하니 차가운 철에 따스한 온기마저 느껴진다. 어찌어찌 절이 폐허가 되면서 버려지기도 했다는 철확. 수많은 세월에 이리저리 닳고 닳다가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된 철확에서 우리네 삶의 모습과 겹쳐진다.

8월의 마지막 주말, 여름기운이 아직 무성한 개태사는 시나브로 가을이 스며들 것이다. 코끝에 바람이 지나간다. 두 계절이 섞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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