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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본 연합군에 맞선 민초들의 피맺힌 함성

격동의 충남 100년 3) 동학군 최후의 우금티 전투

2022.12.23(금) 15:00:23도정신문(deun127@korea.kr)

동학군 의거. 박창돈이 그린 민족기록화 엽서. 1894년 11월 10일 전후하여 일어난 동학봉기는 녹두 장군 정봉준이 손병희 군과 합류하여 충남 공주 부근에서 현대식장비로 훈련된 일본군 및 관군과 6일~7일에 걸쳐 40차례~50차례 전투를 벌인 모습을 그린 삽화이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 동학군 의거. 박창돈이 그린 민족기록화 엽서. 1894년 11월 10일 전후하여 일어난 동학봉기는 녹두 장군 정봉준이 손병희 군과 합류하여 충남 공주 부근에서 현대식장비로 훈련된 일본군 및 관군과 6일~7일에 걸쳐 40차례~50차례 전투를 벌인 모습을 그린 삽화이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1894년 11월 공주 우금티서 격전
동학군, 3일째 후퇴하며 참패


가을 추수가 끝나자 ‘녹두장군’ 전봉준은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1894년 10월 12일 논산에 집결했다. 이때만 해도 그의 휘하 군사는 4천~5천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전봉준은‘북접(北接)’이라하여 충청도와 경기도 동학교도를 관장하던 손병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손병희는 훗날 3·1만세운동 때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북접’의 손병희는 처음 전봉준의 요구를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외세배격’과 ‘탐관오리’숙청을 외치며 죽기를 각오하고 봉기한 뜻을 인정, 동참하게 된다. 

그래서 논산에는 삽시간에 동학 농민군 1만명이 집결하게 되었고, 어떤 기록에는 10만명이 운집했다고도 한다. 그들은 특별한 무기도 없이 죽창에 노란 깃발을 휘날리며 서울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23일에는 공주 이인을 쉽게 점령해 버렸다. 이인은 공주 턱밑에 해당하는 요충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의 내정까지 완전 장악하게 된 일본은 동학군이 공주를 점령해서는 안된다고 판단, 우리 정부에 동원할 수 있는 관군을 모두 투입하도록 압력을 넣는 한편, 일본도 정예 부대를 투입키로 했다. 만약 공주가 동학군에 점령되면 전라도에 이어 전국의 민심이 요동을 칠 것이며 다른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봉기가 이어질 것으로 우려했던 것이다. 전봉준은 공주를 공격하기에 앞서 박제순(朴齊純) 충청감사(지금의 도지사)에게 같은 동포끼리 골육상쟁을 벌이지 말고 일본에 대항해 싸우자며 관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조선·일본 연합군에 맞선 민초들의 피맺힌 함성 사진


박제순 충청감사는 러시아 주재 공사를 지냈으며 공주 우금티(우금치·牛禁峙) 전투가 끝난 후에는 출세가도를 달려 외부대신(외무장관) 등을 거쳐 내각 총리에 까지 오른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그래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을사오적의 악명을 떨쳤고 한일합방의 서명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일본은 그 공로로 은사금과 함께 중추원 작위를 수여했다. 이처럼 뼈 속까지 철저한 친일파 박제순에게 전봉준이 지원을 요청한 것은 동학봉기에 대한 명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감사 박제순이 이끄는 감영군과 서산 부사 성하영 휘하의 부대 등 정부군은 2500명이었으며 이들은 우금티 고갯길 요소에 배치돼 동학군의 진격에 대비했다.

특별한 것은 미나미 고이지로 소좌와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200명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조선군 복장을 하고 있어 겉으로는 일본군의 참전을 감추고 있었다.그러나 이들 일본군 숫자는 200명에 불과했지만 소총 외에 신식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어 매우 위력적이었다. 

동학군은 1차적으로 우금티를 공격했으나 일단 후퇴를 하여 이인에서 공격대열을 재편성했다. 그리하여 11월 8일 북을 울리며 일제히 우금티를 공격했는데 11일까지 3일 동안 이 전투가 가장 치열하고 처참했으며 동학군 최후의 전투가 되고 말았다. 동학군은 효포, 웅치, 판차 등 능선을 따라 세 곳에서 동시에 관군을 공격하여 우금티를 확보하고 공주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학군의 공격 루트를 미리 예견하고 사격하기 좋은 위치에 병력을 잠복시켜 놓았다. 따라서 싸움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군의 신무기, 기관총이 내뿜는 사격 앞에 우리 동학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진격하라!’ 외치는 전봉준의 명령에 동학군은 죽기 살기로 우금티를 향해 달렸지만 3일째 되는 날에는 더 어쩌질 못하고 후퇴를 명했다. 일본군은 후퇴하는 동학군을 향해서도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삿갓재와 승주골은 죽은 동학군의 시체로 가득했으며 후퇴하는 동학군은 시신 수습을 하지도 못하고 흙으로만 덮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이곳 우금티에서 3일간의 전투 중 1만 명이 넘는 동학군 가운데 겨우 살아난 사람은 500명에 불과했으니 이처럼 처참한 전투가 또 어디에 있었던가!

전투가 끝나고 시신을 수습하는데 3년이나 걸렸다. 충남 땅에서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곳이 바로 이곳 공주 우금티인 것이다. 전봉준은 겨우 몸을 숨겨 우금티에서 탈출하여 전라도 순창에 은신했다. 그는 비록 엄청난 병력을 잃고 도피했지만 다시 병력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반드시 우금티의 한을 씻고 동학이 내세운 외세배격, 인간 평등, 부패척결을 실현하겠다는 열정에 불타 있었다.

겨우 152센티의 작은 키, 그래서 어려서부터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던 전봉준이지만 그의 신념은 그렇게 강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가혹했다. 

옛 부하가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관에 밀고하여 체포되고 말았으며 체포되는 과정에서 몽둥이를 맞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을 입었다. 흔히 전봉준의 사진이 가마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소개되지만 다리 부상으로 걸을 수 없어 가마를 제공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조선인이면서도 조선 관아에서 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재판을 받은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조선의 사법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 전봉준은 재판과정에서도 떳떳이 일본군의 궁궐침입을 규탄하고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등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1895년 3월 29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고종 임금은 이를 즉시 재가했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30일 새벽 2시 서울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하여 파란만장한 전봉준의 일생은 40세를 일기로 끝을 맺었다.손화중, 최경선 등 동지들도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시신을 찾을 수 없어 이들의 현재 무덤은 가묘의 상태다.

어쨌든 공주에서 부여로 가는 40번국도 옆에 서있는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아픈 사연을 말해 주는 곳이어서 찾는 이들의 가슴을 무겁게 해준다. 그리고 그 주변의 산등성이와 계곡에는 낙엽처럼 쓰러져간 가난한 동학 농민군들의 피맺힌 함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변평섭 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조선·일본 연합군에 맞선 민초들의 피맺힌 함성 사진


동학혁명군 위령탑. 공주 우금치 전적 동학혁명군위렵탑은 충남도 공주 금학동에 위치하고 있고 사적387호로 지정됐다.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 동학혁명군 위령탑 건립위원회에서 동학혁명군 전적비를 세웠고, 동학농민혁명 100년이 지난 1994년에야 우금치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국가문화유산포털

▲ 동학혁명군 위령탑. 공주 우금치 전적 동학혁명군위렵탑은 충남도 공주 금학동에 위치하고 있고 사적387호로 지정됐다.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 동학혁명군 위령탑 건립위원회에서 동학혁명군 전적비를 세웠고, 동학농민혁명 100년이 지난 1994년에야 우금치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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