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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영웅’

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 (18) 자유의 불꽃을 목숨으로 피운

2022.12.23(금) 14:34:35도정신문(deun127@korea.kr)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영웅’ 사진


1990년 일본 가나자와에 거주하는 박인조는 시민의 모임을 만들어 윤의사가 암장되어 있던 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활동을 펼쳤다. 박인조는 1946년 발굴시 현장책임자였던 박동조의 동생이다. 그는 암장지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기념비를 세워 교육장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에 교포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참여하여 암장지적보존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1992년 4월 가나자와시에 암장지 영구보존공사계획서를 제출하여 6.6㎡의 암장지적을 영구 임대받았다. 그해 10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12월 19일 서거 60주년을 기려 ‘윤봉길암장지적(尹奉吉暗葬之跡)’이라 쓴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비석 아래에는 석실을 만들어 윤의사의 약력을 적은 지석(誌石)과 영정, 그리고 발굴 당시의 사진을 넣었다. 예산의 월진회에서는 박인조를 월진회 일본지부장으로 임명하고 매년 공동으로 행사를 거행하였다. 박인조가 2009년 작고함에 그의 조카인 박현택이 유지를 받들어 암장지적을 관리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들로 구성된 ‘윤봉길의사와 함께 하는 모임’(회장; 田村光彰 교수)이 결성되어 월진회 일본지부와 함께 윤봉길의사의 업적을 현창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가나자와의 민단지부에서도 1992년 12월 윤봉길의사순국기념비를 암장지적 옆에 건립하여 윤의사의 위업을 기리고 있다.  

60여년에 걸친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윤의사의 상해의거 만큼 큰 성과를 거둔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상해의거는 중국 장졔스 정부의 지원과 미주 한인들의 후원에 힘입어 임시정부가 재도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승식장에 늘어서 있던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한 일본 수뇌들을 폭살함으로써 일제의 만주사변 이후 상해사변까지의 승리를 무색하게 하였다. 그리고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된 중국인의 반한감정을 눈 녹듯이 풀어지게 하였으며, 만주지역에서 한중연합투쟁의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중 양국이 우호와 협력의 길을 쌓아 온 것 역시 상해의거의 영향이 크다.  

윤봉길은 농촌계몽운동을 포기하고 망명하여 혁명운동가의 길을 택했다. 그의 상해의거는 당시 군사력이 없던 상황에서 자주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윤봉길은 자신의 길에 대해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자신의 행위가 정의를 밝히는 길이며, 민족의 지상명령이라고 여겼다. 집을 떠날 때 이미 살아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각오하였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망명한 뜻을 실천하였다. 윤의사가 자유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흘린 고귀한 피는 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찬양될 것이다.              
<끝>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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