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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바다가 된 아산만…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가 된 조선

격동의 충남 100년 (2)아산과 성환에서 벌어진 청·일 전쟁

2022.12.06(화) 23:53:22도정신문(deun127@korea.kr)

조선아산육전일본병지대승리. 1894년 청일전쟁 중 조선의 아산에서 일본 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를 소재로 제작한 보도판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조선아산육전일본병지대승리. 1894년 청일전쟁 중 조선의 아산에서 일본 군이 승리를 거둔 전투를 소재로 제작한 보도판화./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동학군 진압이 일본의 조선식민지화 계기
풍도해전, 성환전투로 청일전쟁 본격화


고종 임금의 우유부단함은 마침내 우리 땅을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아산과 성환 일대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이 전쟁이 심각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로 하여 일본의 본격적인 식민지 정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빌미를 제공한 것은 동학농민운동. 1894년 2월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하여 삽시간에 관군을 제압하고 정읍, 고창, 나주 등, 주요 지역을 점령하자 우리 정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특히 농민군이 내건 구호가 탐관오리 척결, 외세배격 등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곧 정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정부는 정부군을 파견, 동학군을 제압하려고 했으나 속수무책으로 그 기세를 꺽지 못하였으며 마침내 전주성까지 동학군의 손에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불바다가 된 아산만…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가 된 조선 사진



무능한 고종은 결국 이들이 서울로 진격해 오리라는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 협상이나 대화로 동학봉기를 수습하려는 의지가 없이 쉬운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그것이 곧 청나라에 동학군의 진압을 요청한 것이다. 그야말로 악수(惡手)를 둔 것.

왜냐면 이미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는 미리 통보하기로 협정이 맺어져 있어 일본으로서는 간절히 기다리던 파병의 구실을 준 것이다. 즉, 청이 개입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일본까지 끌어들이게 된다는 것을 고종은 생각을 못했거나 생각을 했어도 그 결과가 엄청나리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래서 무능한 지도자가 국가적으로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 하겠다. 고종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는 그 해 5월 5일 섭사성을 사령관으로 하는 2500명의 육군 병력을 충남 아산에 상륙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곧바로 천안 성환읍에 있는 월봉산에 진지를 구축했고 일부 병력은 공주로 이동시켰다. 호남지방을 석권하고 서울을 향해 진군하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일본이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했을까? 아니다. 청군이 조선에 파병했다는 통고를 받은 즉시,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에 나섰다. 일본은 재빨리 오시마 요시마사 육군 소장이 이끄는 혼성여단 병력을 조선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용산에 진을 쳤다.

이것이 굉장한 의미를 갖는 것은 고종이 일본군 포위 속에 갇히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은 곧바로 서울에 진주하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심장에 병력을 배치한 일본은 충남에 상륙한 청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보병 4000명을 남하시켰다.

일본은 이렇게 청군을 가볍게 생각했다. 일본군이 잘 훈련되고 규율도 엄격한 데 비해 청군은 제대로 현대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데다 부대 규율도 엉성했기 때문이다.

청군은 일본군이 자기들을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 공주로 향하던 병력을 천안으로 복귀토록 했다. 육지에서 이처럼 청·일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서해에서도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청나라 이홍장이 이끄는 북양함대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고, 이에 맞서 일본 해군도 인천에 6척 등 7척의 군함이 어느 때고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양측이 싸움을 벌인다면 육지에서 먼저 터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전쟁은 바다에서 시작됐다.

7월 25일 새벽 아산의 풍도에 정박 중이던 일본 순양함 요시노 등 3척의 군함이 기습적으로 청국 군함 제원호 등에 포격을 가한 것이다. 물론 선전포고도 없었다. 청나라 군함에서도 공격을 가해 왔고 1시간 28분 계속된 함포공격으로 아산만 일대는 불바다가 되었다. 결국 이 싸움에서 청나라 제원호는 많은 병력을 잃고 도주했으며 광을호는 불타버렸다. 특히 영국으로부터 임대받은 고승호는 침몰했으며 결국 871명의 전사자를 내고 청나라 해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서해 해전에서 청군이 완패하자 성환에 진을 치고 있던 육군의 사기마저 떨어졌고, 당장 보급로가 끊기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반대로 서해 해전에서 완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은 일본군의 사기를 높였을 뿐 아니라 그 기세를 몰아 7월 27일 새벽 성환읍 월봉산에 진을 치고 있던 청나라군을 향해 포격을 퍼부우며 공격을 개시했다.  역시 일본군의 민첩함을 보여준 것이다. 

오오시마 육군 소장이 이끄는 일본 혼성 여단 병력은 청군의 퇴로까지 차단하며 공격을 펼쳤고 그래서 청군은 성환을 겨우 벗어나 충북 청주, 진천을 거쳐 강원도로 우회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그야 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청군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았다. 계속 추격하여 8월 17일에는 평양까지 쫓아가 청군을 완전 제압하고 말았다. 

이후 황해해전 등을 거쳐 전쟁이 끝난 후 일본 시모네세키에서 1895년 4월 청·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청나라는 이 전쟁의 책임으로 엄청난 보상비를 일본에 지불했을 뿐 아니라 대만과 요동반도를 일본이 차지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사태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동안 청나라에 쏠려 있던 조선의 운명이 그것도 막강한 청나라 군대를 바다에서 육지에서 완전히 무찌른 일본군의 위협 속에 놓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조선의 통치는 새로 부임한 일본의 특명전권공사에 의해 좌지우지하는 꼴이 되었으니 얼마나 쓰디쓴 역사의 운명을 맞이해야 했던가! 무능했던 임금, 부패한 세도정치가 보여준 그 업보가 하필이면 우리 땅 충남에서 벌어졌음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변평섭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불바다가 된 아산만…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가 된 조선 사진
 


진청암. 충남 아산시 염치읍 강청리에 있는 표석으로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랫동안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을 진압했다는 의미로 세웠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 강청리 북쪽 영인산 너머 영인면 일대가 1894년 당시 청나라 군대가 머물던 곳이고, 뒤에 일본군이 며칠간 머물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본래 진청암은 풍수지리의 비보개념으로 세워졌다. 마을에 맑은 물이 풍족해지기를 기원하는 의미의 표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진청암. 충남 아산시 염치읍 강청리에 있는 표석으로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랫동안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을 진압했다는 의미로 세웠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 강청리 북쪽 영인산 너머 영인면 일대가 1894년 당시 청나라 군대가 머물던 곳이고, 뒤에 일본군이 며칠간 머물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본래 진청암은 풍수지리의 비보개념으로 세워졌다. 마을에 맑은 물이 풍족해지기를 기원하는 의미의 표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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