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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사투리의 걸쭉한 입심, 소설가 이문구

윤성희의 만감(萬感)

2022.10.24(월) 15:17:33도정신문(deun127@korea.kr)

명작의 고향인 보령시 대천동 관촌마을 모습

▲ 명작의 고향인 보령시 대천동 관촌마을 모습


보령 출신 소설가 이문구는 인간적으로 보면 짠한 생각이 드는 사람이다. 6.25때 남로당 보령군 총책을 맡았던 부친이 경찰에 붙잡혀 죽었고, 둘째와 셋째 형도 부친에 연루된 혐의로 그때 같이 죽임을 당했다. 생때같은 아들과 두 손자의 죽음을 목격한 작가의 조부도 참상을 견디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천둥과 벼락이 몰아치던 가족사의 한복판에 서 있던 작가의 나이는 그때 아직 열 살이었다.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빨갱이 자식’이었던 이문구에게 소설 쓰는 일 말고는 달리 할 만한 게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그 비극적인 가족사는 우리 문학사가 큰 산맥 하나를 융기하는 분기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로 하여 우리는 위대한 소설가 한 명을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훗날 어떤 사람은 그를 일컬어 ‘장엄하고 우뚝한 문장의 산맥 하나를 온전히 홀로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그가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한국문학의 왕이 붕어(崩御)했다’고도 썼다. 

보령시 대천동 ‘관촌마을’은 작가의 출생지이자 그가 쓴 수많은 작품의 무대였다. ‘나의 선대와 나를 키워준 고향이라는 애착심보다 부모 형제를 잡아먹은 원수와 다름없는 저주의 땅’이라고 외면했지만 끝내 고향을 끌어안고 살았던 이 땅의 작가였다. ‘관촌수필’이나 ‘우리동네’ 연작들은 고향이라는 바다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물질을 한 망사리 속 채취물이었다. 우리는 그 채취물들로 하여 작가의 고향에 대한 질긴 숙명과도 같은 애착을 본다.

나는 충청도의 입말을 그토록 찰지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이문구 말고는 보지 못했다. 판소리로부터 연원한 해학과 풍자가 김유정, 채만식을 거쳐 이문구에 이르러 마침내 바다를 이루었다고 믿는다. 북한에 벽초 홍명희가 있다면, 남한엔 명천 이문구가 있다는 말은 헛말이 아니다. 이문구를 발탁한 스승 김동리가 이문구를 두고 ‘우리 문단에 가장 독특한 스타일리스트가 나올 것’이라 했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관촌수필’의 무대가 되었던 부엉재와 왕소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관촌마을’ 안내비가 있지만 그조차도 도시화의 뒷전으로 밀려나 있어 바라보는 심회가 쓸쓸하다. 그이 작품은 걸쭉한 언어의 유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 문학의 귀함은 사라지고 있다.
/윤성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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