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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대한의 청년, 윤봉길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11)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다

2022.10.04(화) 10:53:56도정신문(deun127@korea.kr)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사진


윤봉길은 1932년 4월 26일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한다는 선서문을 혈서로 쓰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다음 날부터 일제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 공원을 답사하였다. 사열대 만드는 것을 보고 근처까지 가서 거사를 감행할 적당한 위치를 골랐다. 그리고 공동 조계(租界) 안의 일본인 상점에 가서 일본 보자기 1장을 구입하고 숙소를 동방공우(東方公寓)  30호로 옮겼다. 숙박부에 이름을 적고, 국적은 한국, 나이는 25세라고 적었다. 이날 저녁 김구가 호텔을 방문하였다. 윤봉길은 공원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고 김구와 함께 안공근의 집으로 가서 양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단신 사진과 태극기를 배경으로 가슴에 선언문을 펴 붙이고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있는 사진, 그리고 김구와 함께 서 있는 사진 등 모두 3장을 찍었다. 

거사 전날인 4월 28일 정오에 김구와 중국기독교청년회관에서 술과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일본인 상점에 가서 시라카와 대장과 우에다 중장의 사진과 일장기도 구입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상념에 잡혀있던 중에 김구가 다시 찾아왔다. 후일을 위하여 이력서와 유서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윤봉길은 ‘이력서’라고 쓰고 본적과 본관을 쓰고 부모 이름을 썼다. 이어서 ‘7세에 사숙에 들어가 8, 9명 동기 중에서 총명하였음으로 선생과 이웃 동리의 부형들로부터 재동이라고 불렸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자신의 약력을 쓰기 시작하였다. 15세 때 지은 ‘학행(學行)’이란 시도 적었다. ‘시량동가’도 적었다. 그리고 수화(水禍)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볼 수 없어 귀에 쟁쟁거리는 상해 임시정부를 향해 압록강을 건너 청도를 거쳐 상해에 왔음을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유족(遺族)’이라 쓰고 부모님과 처, 그리고 두 아들의 이름과 생년 등을 적었다. ‘가족’이라고 쓰지 않고 ‘유족’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거사 후에 자살을 결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아들에게 주는 유서를 썼다. 여기에서 그는 두 아들에게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광복의 날에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으라”고 유언하였다. 이어서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면서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이를 동서양 역사에서 보건대 맹자와 나폴레옹,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들은 그러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당부하였다. 죽음을 앞둔 아비가 어린 아들들에게 남긴 마지막 사랑의 가르침이었다. 
/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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