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덕사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요. 연못에는 노랑어리연이 피어있어서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초입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이 동상은 1973년 최익현 선생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군민들이 모금하여 건립하였던 것으로 우리나라에 몇 점 안되는 높이 4m의 진귀한 시멘트 동상이라고 합니다.
최익현 선생은 이항노의 제자로 문학과 도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현감에까지 올랐으나 나라를 걱정하며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리고 흑산도에 유배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해 일본의 죄상을 16개 항목에 적어 항쟁하며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적군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 끝내 순국하였습니다. 후에 그를 추모하는 사림들이 태인, 포천, 곡성 등 여러 지역에 그의 사당을 세웠습니다.[자료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면암 선생의 동상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면암 선생의 유품과 유물을 전시한 대의관(大義館)이 있는데요. 1982년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대의관 안에는 최익현 선생께서 생전에 사용하던 피혁류, 필기구 등 총 9종 128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의관을 지나면 춘추각(春秋閣)이 나오는데요. 이곳은 면암 선생의 서책, 서간문 등을 보관하기 위해 1985년에 건립하였으며 전적류 4,023점, 서찰 및 고문 서류 1,974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면암 선생의 고택(古宅)입니다. 선생께서 1900년에 지으셨으며 안채, 사랑채, 그리고 조상의 위패를 모신 영모재(永慕齋)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면암 선생은 이곳 사랑채에서 애국지사를 모아 강의하거나 독립을 논의하였다고 합니다.
고택 왼편에 사당(祠堂)이 위치하고 있는데 사당 입구의 모습입니다. 양측에 큼지막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모덕사(慕德祠)라고 새겨진 사당이 보이는데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52호로 지정되어 있는 사당입니다. 1914년 유림에서 건립하여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9월 16일 유림 주관으로 추모제를 지냅니다.
사당 담장 옆에는 키가 큰 잣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요. 이 잣나무는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선생이 한국전쟁 중 북한군으로부터 수도 서울을 수복한 기념으로 1953년 3월 13일 이곳 '모덕사'를 방문하여 '환도고유제'를 지낸 후 기념으로 식수한 나무라고 합니다. 신익희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의 내무총장과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역임했던 분입니다.
모덕사 옆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영당(影堂)이 있는데요 그 앞에는 "성충대의의사비(聖忠大義意思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영당으로 들어가는 문인데요.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영당 내부는 제법 넓은 편입니다. 멀리 보이는 건물이 면암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영당입니다. 영당에서는 매년 4월 13일 의병을 일으킨 날을 기념하여 청양군 주관으로 제향을 봉행한다고 합니다.
영당에는 '성충대의(聖忠大義)'라고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어요. 영당 안으로 한번 들어가 볼까요?
영당 안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영정이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영정은 면암 선생이 73세(1905년) 때 정산 현감으로 있던 채용신(蔡龍臣)이 그렸으며 현재 영당에 봉안되어 있는 영정은 이종상 서울대학교 교수가 모사하여 건물 준공과 함께 봉안한 것이라고 하네요.
홍살문도 세워져 있습니다.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며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모덕사 앞 저수지에서 바라본 모덕사의 전경입니다.
저수지에는 노랑어리연이 가득 피어있어요.
조선말기의 학자이시며 의병장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살신성인하신 면암 최익현 선생의 사우인 모덕사를 찾아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것도 후손의 작은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