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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출가생불환’ 남기고 상해로

대한의 청년, 윤봉길윤봉길의사 상하이 의거 90주년7) 망명의 길을 떠나다

2022.07.25(월) 18:01:58도정신문(deun127@korea.kr)

윤봉길의 '장부가'

▲ 윤봉길의 '장부가'



1930년 3월 6일 아침, 농촌에서는 조금은 한가한 때이다. 윤봉길은 사랑방으로 가서 붓을 들고 자신의 굳은 결심을 써내려갔다. ‘장부출가생불환 (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 일제를 몰아내어 해방의 날이 오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는 그의 비장한 유서였다. 

아내가 차려 준 마지막 밥상을 받았다. 아내와 두 돌 지난 아들 종(淙)이가 눈에 밟혀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마루를 나와 어머니가 거처하시는 안방으로 갔다. 어머니는 친정에 가셔서 안계시지만 방안을 둘러보고 싶었다. 안방을 나와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얼굴을 눈에 담아 둘 요량이었다.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왠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멋적은 듯이 ‘물 좀 한 그릇 주오’라고 말하자 아내는 물 한 대접을 내밀었다. 아내는 남편이 망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전날 밤에 “내일 새벽에 떠나 언제 돌아올지는 확실하지 않으니 그동안 애들이나 잘 보살펴주오”라고 하여 남편의 비장한 뜻을 읽기는 했다. 사랑방을 향해 가는데 아버님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아침부터 황건을 쓰고 계셨다. 담뱃대를 붙잡고 문지방을 집으신 채 ‘어디 갈 작정이냐’고 하셨다. 윤봉길은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대문 밖으로 빠져 나왔다. 문 밖에서 집 주위를 획 둘러보았다. 18살부터 야학을 만들고, 월진회 활동을 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고향을 이상촌으로 만들겠다고 열성을 다하고 발버둥 쳤지만 일제의 식민지하에서는 모든 것이 한계가 있었다. 사람으로서의 기본권마저 박탈당했으며, 경제적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후일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집을 떠난 것은 천만번 생각한 결과라면서 부모형제와 처자에 대한 사랑보다도 한층 더 굳센 사랑이 있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윤봉길은 신문을 통해서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수화(水禍)에 빠진 사람을 보고 태연히 앉아서 볼 수 없다”는 각오로 상해로 향한 것이다. 집을 나온 윤봉길은 삽교역에서 서울행 열차에 올라 다시 보지 못할 고향 풍경을 오롯이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이 보고 또 보았다. 오후 3시경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신의주까지 가는 경의선이 출발하려면 여유가 있었다. 사촌 동생 윤신득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그를 만나 월진회의 일을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윤신득은 외출 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서울역으로 돌아와 신의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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