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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임진왜란시 왜적과 싸우다 순직한 칠백 의사의 발자취를 살피다

2022.02.27(일) 12:59:32해송이송희(shreer@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칠백의총은 사적 제105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칠백 의병의 무덤입니다.
칠백의총은 1592년(선조25) 8월 22일에 건립되었으며 1963년 1월에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겨울도 저물어 가는 봄날씨처럼 포근한 날 칠백 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칠백의총을 찾아보았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먼저 입구에 있는 칠백의총기념관을 둘러봅니다. 지난 해 3월 16일 문을 연 칠백의총기념관은 전체면적 2,442㎡, 지하 2층부터 지상 1층의 규모입니다.
유물 관리 수장고, 전시실, 4차원 입체(4D) 영상관, 학예연구실 등을 갖췄습니다. 
전시공간은 크게 2개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제1전시실은 임진왜란의 개요와 1592년 7~8월 사이에 있었던 1차·2차 금산전투의 전개 과정, 의미, 전후 칠백의총의 조성 과정을 소개하는 공간이며 제2전시실은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등 당시 전투를 이끌었던 의병장들에 대한 소개와 관련 유물이 전시되며 함께 싸웠던 칠백의사와 승병들에 대한 추모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먼저 1전시관으로 가볼까요?
입구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전시물인데요 임진왜란 당시의 복식과 무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군이 일본군에 무참히 패하고 국토가 짓밟히고 수많은 백성이 죽어가자 내 고장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일어난 의병은 정식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라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으며 몇몇 사람들이 사재를 털어 운영되다 보니 제대로 된 무기나 복식을 갖출 수가 없었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1전시실 내부의 모습입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살아 움짐이는 전투 기록화'라는 재미있는 VR 기록화 장비가 있어 흥미롭습니다.
양쪽 손잡이를 잡고 좌우로 움직여서 벽에 표시된 리스트에 맞추면 그에 대한 설명이 VR로 나오게 됩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고지도 속의 칠백의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군사, 행정 등의 목적으로 도별, 군현별, 전국지도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청구도, 청구요람, 광여도, 해동지도, 금산군지도, 여지도, 지승, 호남지도 등 고지도 속에는 칠백의총을 비롯해 종용사, 고경명순절비가 표시되어 있다고 합니다.(왼쪽에서 부터 광여도, 여지도, 청구도)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이곳에서는 순의비의 복원에 대해 영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는 의병장 조헌 선생이 이끄는 칠백의사가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순결하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비문입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전국의 의총과 사당에 대해 영상과 설명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네요.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사당 정보보기→ 충청남도를 선택하면 갑사 표충원을 비롯하여 충남 지역의 사당이 차례대로 보여집니다. 같은 방법으로 전국의 의총도 볼 수 있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1전시실에서 제2전시실로 올라가는 길은 이처럼 빛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서 길 이름도 '빛의 길(Path of Light)라고 했네요.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2전시실 내부의 모습입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2전시실에서는 의병들의 소개와 교지, 서적 등 고문서들을 볼 수 있는데요 중봉 조헌 선생이 157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순수 쓴 일기책인 조천일기(아래쪽 맨 우측), 조헌 선생이 1567년 24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위 우측에서 두 번째), 조헌 선생이 순절하신 291년 후인 1883년 11월 고종황제께서 조헌 선생을 문묘(文廟)에 해향(配享)하도록 명한 문서인 교서(敎書)(위 맨 우측)는 모두 보물 제 100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옆쪽에는 21개의 비석이 있는데 질백의총 앞에 있는 종용사(從容祠)에 안치된 의병장 조헌, 의승장 영규를 비롯한 21위(位)의 위패를 상징화한 것으로 위패를 전시관으로 모셔온 것은 칠백의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벽면에는 7백의총 이름이 투사되고 있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기념관을 모두 둘러본 다음 칠백 의병의 무덤이 있는 칠백의총으로 향합니다.
칠백의총은 기념관 뒷편으로 3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정문 우측에 칠백의총 안내도와 설명서가 자세하게 게시되어 있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작은 연못이 있는데요. 아직 얼음이 꽁꽁 얼어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연못을 지나면 의총문이 있어요.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의총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순의비각이 있습니다.
이 비는 제1전시관에서 잠깐 설명했듯이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先生一軍殉義碑)인데요 의병장 조헌 선생이 이끄는 칠백의사가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순결하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비문으로 윤근수가 글을 짓고 김현성이 글씨를 써서 1603년 4월에 칠백의총 옆에 건립한 것입니다.
1940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인 금산경찰서장에 의해 폭파되었던 것을 인근 주민들이 뒷산에 묻어두었다가 해방 후에 다시 파내어서 보관 중 1971년 4월 파괴된 비의 조각을 붙여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몸체와 머릿돌이 분리되어 있던 비를 2009년 9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며 비의 규모에 맞추어 비각을 목조양식으로 개축하였다고 하네요.

- 칠백의총 안내책자(문화재청)에서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순의비각을 지나면 계단과 함께 취의문이 나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취의문을 통과하면 언덕 위에 종용사(從容祠)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종용사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 싸움에서 순절하신 선열들의 영혼을 모신 21위(位)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1647년 당시 호서·호남지방의 유림에 의해 사당이 건립되었고 1663년 현종께서 '종용사'라 사액하였습니다. 1940년 일제의 항일유적 말살정책에 따라 훼손되었다가 1952년 복원되었고, 1971년 재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 칠백의총 안내책자(문화재청)에서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종용사 안에는 21위의 위패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습니다.

금산 칠백의총을 찾아 의병의 뜻을 기리다 사진



종용사 바로 뒤편에는 칠백 의병이 잠들어 있는 칠백의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 선생과 의승장 영규 대사가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이 금산 연곤평에서 1만 5,000여 명의 왜적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 전승업 등이 유해를 거두어 함께 모셔놓은 무덤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신분으로 왜적과 용감히 싸우다 금산 연곤평 전투에서 모두 장열히 산화하신 영혼을 모신 칠백의총, 그분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호국정신을 높이 기리고 아울러 우리 후손들이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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