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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2021.03.15(월) 01:31:17양창숙(qkdvudrnjs@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 초등학교 도덕선생님이 “너는 자라면 어느 위인처럼 되고 싶니?”라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이순신 장군요.”라고 했다.

그리고 개중에 유관순 열사, 강감찬 장군, 을지문덕 장군 등 나라를 위해 위국 헌신하신 여러 분들이 아이들의 희망에 오르내렸다. 모두 다 고맙고 위대한 우리의 민족혼들이시다.
 
도민리포터는 이분들에다가 충남 당진의 충장공 남이흥 장군을 더하고 싶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는 충장사와 종갓집, 장군의 묘소 등이 한눈에 보인다.
  
남이흥(1576~1627) 장군은 조선시대 무장이다. 그의 부친께서는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군을 섬멸하는 공훈을 세우고 전사한 남유 장군이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남이흥장군의 묘소와 그의 묘비, 그리고 부인의 묘도 합장되어 부인의 묘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장군은 1602년(선조 35) 27세에 무과에 급제해 28세에 선전관 겸 비변사에 등용됐고, 42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진주 목사로 제수 받았다.
 
장군은 45세에 평안도 방어사 겸 안주 목사를 역임하고, 1622년 47세에 자헌대부(정2품)로 승진하였다. 624년에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도원수 장만과 함께 진무 1등공신에 봉해졌다.
  
그리고 1627년(인조5)에 3도 부원수 겸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계실 때 후금(청국)의 3만6천 대군이 침공한 정묘호란을 맞아 안주성 싸움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숫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적을 유인하여 끌어들인 후 화약고에 불을 붙여 자폭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 분이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그분의 위국헌신 애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향이자 생가가 있는 당진에 사당과 기념관을 건립하고 현재 후손이 자리를 지키며 관리하고 있다. 사당은 충장사이고 사진은 충장사 옆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기념관이다. 이름은 묘충관이다.
  
정묘호란으로 나라를 지키다 전사하자 장군의 장렬한 죽음이 청국에까지 전하여져 적국에서 조차 근엄한 조의를 표하였다 한다.
 
장군의 시신이 서울에 도착하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면서 친히 어의를 벗어 덮어주었다. 인조 임금은 국장으로 장례토록 명하고 장군을 덮어준 곤룡포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유물관에 소장돼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기념관 안에는 장군의 초상화를 비롯해 많은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이곳에는 남이흥 장군 일가 유품이 중요민속자료 제21호로 지정돼 전해져 온다.
  
장군의 전사 이후 조정에서는 장군을 의정부 좌의정으로 추증하고, 의춘부원군에 봉하였으며 충장의 시호와 아울러 특별한 충신에게만 내리는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내려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특히 장군이 전사한 평안도 안주에 사당인 충민사를 짓고 그 좌우 주변에 10명의 공신들을 배향했을 정도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남이흥 장군의 초상화가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원래 장군의 묘는 경기도 성남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고향인 이곳 당진으로 옮겨왔다.
 
위의 사진은 묘를 이장할 당시 파낸 관이었는데 그 두께와 보존 상태가 바로 몇달 전에 만든 것처점 원형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실제 관 나무의 두께를 보면 원목이 거의 12~13cm는 된다. 묘의 이장 과정에서 부장되었던 각종 유물들이 함께 이전되어 더욱 다양하고 풍부한 유물들이 추가되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이 서책은 1856년(철종 7년) 나라에서 내려준 남이흥 장군 일가의 재산목록이 담긴 '사패절목'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이것이 바로 왕이 장군에게 내려준 교지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진무원종록권이라는 종군 기록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장군에게 진무일등공신훈록이 내려진 진무공신단서도 전시돼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장군이 사용한 활과 화살, 화살을 담았던 화살통이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위업 사진
 
이것은 녹피방령포이다. 녹피방령포는 남이흥 장군이 전쟁 당시 입었던 옷이다. 녹피는 사슴 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이고 방령포는 옷의 깃이 네모지다는 뜻이다. 방령포에는 장군이 화살을 맞아 흘린 핏자국이 남아 있어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의령남씨 충장공파 종가는 당진 대호지면 도이리에 조선 중기부터 터를 잡고 살아오고 있으며, 대대로 뛰어난 업적과 군공을 세웠고, 지금도 종가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남이흥 장군의 위업과 애국 충정을 충남도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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