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홍성이야기’ 두 번째로는 조양문과 성지순례 감옥터를 준비했습니다. 1972년 홍주성은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양문은 그 홍주성의 동문이자 홍성군의 관문이라고 합니다.
▲홍주성의 동문 조양문
항일의병이 일어났던 당시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올해는 3.1절 102주년이 되는 해로 때마침 이를 기념해 대형 태극기를 조양문 전면에 걸어두어 항일투쟁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조양문 측면
▲조양문 측면
일본인들에 의해 경의문인 서문과 망화문인 북문, 동문인 조양문도 파괴되었는데 부분 보수를 통해 그나마 형태가 남아 있던 조양문을 1975년 문루를 해체·복원했다고 합니다.
▲조양문 누각
▲조양문 누각
그래서 그나마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양문은 이렇게 홍주성의 중심으로 지금까지도 멋지게 건재해 있습니다.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그리고 홍주성 천년여행길과 함께 천주교 순례길도 같이 있는데요, 그 순례길의 일부인 천주교 순교자 감옥터가 홍주성 안에 있어서 탐방해 보았습니다.
▲원시앙 베드로 교수형 재현비
홍주의 순교자 212명이 이 감옥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감옥에서는 교수형이 제일 많았고 충청도 최초 순교자인 원시앙 베드로도 여기서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재현한 비가 감옥터 앞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홍주 지역의 최대 순교터라고도 합니다.
▲순교우물터
▲순교우물터
감옥터 바로 앞에는 우물터도 있었습니다. 이 우물에서 원시앙 베드로가 옥중세례를 받고 동사한 순교우물터라고 합니다.
홍성 하면 역사, 역사하면 홍성, 홍성과 역사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련을 지니고 듯합니다. 특별히 3.1절 지난 즈음에 항일투쟁의 역사를 간직한 조양문과 홍주순교성지 감옥터를 소개하게 되어 그 의미가 더 큰 듯합니다.
▲홍주성의 동문 조양문
항일의병이 일어났던 당시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올해는 3.1절 102주년이 되는 해로 때마침 이를 기념해 대형 태극기를 조양문 전면에 걸어두어 항일투쟁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조양문 측면
▲조양문 측면
일본인들에 의해 경의문인 서문과 망화문인 북문, 동문인 조양문도 파괴되었는데 부분 보수를 통해 그나마 형태가 남아 있던 조양문을 1975년 문루를 해체·복원했다고 합니다.
▲조양문 누각
▲조양문 누각
그래서 그나마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양문은 이렇게 홍주성의 중심으로 지금까지도 멋지게 건재해 있습니다.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홍주순교성지 감옥터
그리고 홍주성 천년여행길과 함께 천주교 순례길도 같이 있는데요, 그 순례길의 일부인 천주교 순교자 감옥터가 홍주성 안에 있어서 탐방해 보았습니다.
▲원시앙 베드로 교수형 재현비
홍주의 순교자 212명이 이 감옥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감옥에서는 교수형이 제일 많았고 충청도 최초 순교자인 원시앙 베드로도 여기서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재현한 비가 감옥터 앞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홍주 지역의 최대 순교터라고도 합니다.
▲순교우물터
▲순교우물터
감옥터 바로 앞에는 우물터도 있었습니다. 이 우물에서 원시앙 베드로가 옥중세례를 받고 동사한 순교우물터라고 합니다.
홍성 하면 역사, 역사하면 홍성, 홍성과 역사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련을 지니고 듯합니다. 특별히 3.1절 지난 즈음에 항일투쟁의 역사를 간직한 조양문과 홍주순교성지 감옥터를 소개하게 되어 그 의미가 더 큰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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