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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갈비기

2021.01.19(화) 18:06:12가람과 뫼(caption563@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대흥리에 있는 봉선홍경사갈기비는
고려 현종 때 세워진 것으로 1962년에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교통상 중요한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갈대가 우거지고
마을도 주막도 없어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등 오가는 나그네들을 위협하여
사람의 통행이 매우 어려웠다 한다.
 
이에 왕이 스님 형긍으로 하여금 6년여에 걸쳐
200여 칸에 달하는 법당과 부속건물 등을 지어 봉선홍경사(奉先 弘慶寺)라 하였고,
사찰 서쪽에는 80여 칸 크기의 객관(客館)인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을 지어
나그네들의 편리를 도와 마음 놓고 쉬어갈 수 있게끔 하였다 한다.
 
입구
▲입구
 
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갈비기 사진
 
이곳에 사찰을 둔 것은 현종의 부왕(父王) 안종이 불교에 심취하여 원찰을 창사하려다 서거하자
현종이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사찰을 완성하고 봉선홍경사라 지었다 한다.

그 후 명종 6년, 향·소·부곡 등 특수행정구역에 사는 백성들이 신분제 타파를 기치로 
공주 명학소를 중심으로 한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난군에 의하여 불태워졌다 한다.
 
절터가 있던 이곳에는 지금은 비각 주위로 수십여 그루의 소나무와 무너진 석탑이 있고
주변은 논밭으로 바뀐 지 오래되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갈비기 사진
 
비각
▲비각
 
비(碑)의 높이는 여섯척 사촌이요, 폭은 삼척 삼촌이며 그 두께는 여덟촌이다.
비신 상단에 '봉선홍경사갈기(奉先弘慶寺碣記)'라 횡서로 쓰여 있으며,
지은이는 당시 해동공자로 칭송되던 호연 최충이고, 쓴이는 백현례라 되어 있다.
 
귀부의 입가에 아가미 같은 형태가 있는 어룡(魚龍) 형태의 비석으로 머리를 우측으로 향하고 있다.
비신의 외주(外周)는 당초문대를 양측면에는 보상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비석을 세운 건 비문 말미의 내용으로 보아 사찰 창건 5년 후인 1026년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비석
▲비석 
 
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갈비기 사진
 
홍경사 창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은 기단석도 파괴되고 옥개석도 다 흩어져
지금은 탑신 하나에 옥개석 하나만이 덩그라니 남아 있다.

홍선홍경사갈비가 국보로 지정되고 주변 환경은 정비되었지만 찾는이 없는 지금은 황량하기만 하다.
말없이 우뚝한 용두는 오늘도 서녁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더 시간이 가기 전에 우리 문화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더 잘 보존되었으면 한다.
  
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갈비기 사진
 
오랜만에 닥쳐온 한파가 온세상을 얼려 버릴 듯 매섭다.
돌아 오는 길에 추위도 녹일 겸 시장기도 해결하고자 성환 이화시장에 들렀다.
이화시장은 1일과 6일에 장이 선다.
 
장날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장꾼들과 손님들이 어우러져 제법 시끌벅쩍하다.
이곳에서는 장날 전날과 장날에 순대국밥 집들이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그 맛이 담백하여 많은 이들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는다.

뜨끈한 순대국을 대하니 추위가 가시는 듯싶다.
정겨운 주인 아주머니의 미소가 푸근하다.
 
국보 제7호 봉선홍경사갈비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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