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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공주와 아산의 김옥균 유허지

2020.08.19(수) 11:28:26대로(dried@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정안 IC 진입 바로 이전에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로 진입하는 도로 옆에 '김옥균 선생 유허지'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저기에 뭐가 있을까 늘 궁금했지요.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위 고가도로는 세종시에서 정안 IC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진입로입니다. 그 아래 23번 국도로 진입하기 바로 전에 김옥균 선생 유허지가 있습니다.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좁은 농로를 따라 100m쯤 들어가 차를 세웠습니다.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거기엔 정말 비석 몇 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유허지일 뿐입니다. 유허지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기록만 남아 있고, 그 장소에 유물·문화재가 전혀 없는 곳입니다. 이곳이 김옥균 선생의 생가지였다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김옥균 선생은 바로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난 것이지요.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유허지의 한가운데에 비석이 하나 덩그마니 세워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고균 김옥균 선생 추모비'라고 씌어 있습니다. 비석 앞에는 한 무더기의 무릇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비석 뒷면에는 김옥균 선생의 행적에 대하여 한글과 한자로 빼곡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옥균은 조선 고종 때의 정치가로서, 서구 문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개화파가 되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나자 해외 도피 생활을 계속하다 피살된 인물입니다.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김옥균의 생가지는 그의 비참한 죽음만큼이나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불과 며칠에 불과하였지만 천하를 호령하였던 김옥균의 기개를 떠올리며 당시 갑신정변이 성공하였더라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하면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충청남도 아산시를 여행하던 중 뜻밖에도 또다시 김옥균 유허지라고 써져 있는 이정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과연 여기에는 김옥균과 관련된 무엇이 남아 있다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곳이 김옥균의 묘소임을 알려주는 안내석이 서 있었습니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망명 생활을 하던 중 상해에서 암살당한 후 시신이 서울로 옮겨져 능지처참을 당하자, 일본인 친구들이 그의 의관과 머리카락·손톱·발톱 등을 거두어 일본의 외인 묘지에 매장하였던 것을 그의 양아들인 아산군수 김영진이 이를 수습하여 부인 유씨와 함께 이곳에 안장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유허지 옆 인도에도 김옥균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비록 그의 온전한 시신은 묻혀져 있지 않지만 봉분은 제대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있습니다.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주변에 비석과 다양한 석상들이 세워져 있어 김옥균이 큰 인물이었음을 대변하고 있었지요.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김옥균 선생의 유품 등과 그 부인의 시신이 묻혀 있는 묘소의 모습입니다.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비문에는 '고균거사 안동김공 김옥균지묘, 배 정경부인 기계 유씨 부좌'라고 써져 있습니다. 김옥균은 거사로, 부인은 정경부인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전에 호조참판을 지냈고, 사후 반역죄가 사면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는데도 그냥 거사라고 표현한 것이 그의 생애의 질곡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참고로 거사란 숨어 살며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말합니다.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김옥균의 사당이 그의 묘소 옆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3일천하 갑신정변 김옥균 유허지를 가다 사진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갑신정변은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개혁운동이었으며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서 보다 잘 사는 나라,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한 선각자들의 뜻이 서려 있습니다. 다만, 너무 급진적이었으며,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실패를 좌초한 것 같습니다.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지향하였던 인민평등 사상은 갑오개혁을 비롯한 개혁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김옥균 선생에 대한 평가는 서로가 지향하는 가치와 이념에 따라 크게 달라지겠지만, 그의 개혁정신은 높이 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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