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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는 만행의 근본 역대 최초의 효자향덕비

한반도 최초의 효자 선정비가 충남 공주에 있다

2020.08.16(일) 19:54:19계룡도령춘월(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가화만사성'이라 하며 효와 충, 예를 중요시하는 유학이 모든 것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는데 그래서일까요? 효자와 충신, 열녀와 열부를 모신 정려가 충청남도에도 꽤 많습니다.
 
효는 만행의 근본 역대 최초의 효자향덕비 사진
 
그 많은 효자비 중에서 최초로 나라에서 최초로 세운 효자비를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효자 향덕비로 충남 공주시 소학동에서 만나 볼 수 있는데요, 한반도 최초로 나라에서 세운 효자비가 거기에 있답니다.
 
효는 만행의 근본 역대 최초의 효자향덕비 사진
 
1982년 공주시에서 보호수로 지정·관리하고 있는 수령 500년은 족히 넘긴 엄청나게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수문장처럼 서 있는데, 그 뒤로 비각이 보이죠? 저 비각 속에 있는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나라에서 내린 효자비랍니다.
 
효는 만행의 근본 역대 최초의 효자향덕비 사진
 
보호수 느티나무에서 20m 가량 들어가면 근처에는 유형문화재 선정비와 안내문이 세워져 있고, 그 가운데 자리잡은 비각은 1982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선정된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公州巢鶴里孝子向德碑)를 보호하고 있으며 비각의 규모에서 일반적으로 만나는 것과는 크기가 이미 다릅니다.
 
효는 만행의 근본 역대 최초의 효자향덕비 사진
 
향덕(向德)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5대 경덕왕 때 자신의 살을 베어 모친을 봉양한 효자로 지금의 현 공주 소학동 효가리 마을인 웅천주(熊川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으로 아버지 이름은 선(善)이고 자(字)는 반길(潘吉)로 알려져 있습니다. 향덕이 언제 태어나고 떠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효행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동국삼강행실도(東國三綱行實圖)’ 등에 소개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742~765) 시절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향덕의 집안은 타고난 천성이 온후하고 선량하였고 향덕 역시 효성스럽고 순하여 향리에서 부자의 인성과 행실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경덕왕(景德王, 742∼765)의 재위 기간에는 전국에서 천재지변이 발생해 나라 안이 뒤숭숭했으며 경주에 계란 크기의 우박이 내렸고, 가뭄이 심하게 들기도 했으며, 연이어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몹시 팍학하였다 합니다. 이때 향덕의 부모도 역시 굶주리고 병이 났으며, 어머니는 등에 종기가 나 거의 죽게 되어 향덕이 밤낮으로 봉양하였으나 먹을 것이 없어 부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내 이를 끓여 먹이고, 등창은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회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고을 관리가 주(州)에 보고하고, 주에서 왕에게 보고하여 나라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에 왕은 그 효행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 교서와 함께 집 한 채와 조(租) 3백 곡(斛),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려 치하하고 지역 관청에 명하여 그의 효행을 기록한 비석과 정려문(旌閭門)을 세워 향덕의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사람들이 그곳을 이름하여 효자 마을 ‘효가리(孝家里)’, 효포(孝浦)라고 부른답니다.
 
효는 만행의 근본 역대 최초의 효자향덕비 사진
 
소학동의 보호수 동쪽으로 지어진 비각에는 옛것과 다시 만든 비 2기와 비석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2개가 있는데, 2기의 비는 신라 경덕왕(742∼765) 때의 효자(孝子) 향덕(向德)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비(旌閭碑)입니다.
 
효는 만행의 근본 역대 최초의 효자향덕비 사진
 
'新羅孝子向德之閭(신라효자향덕지려)'라고 쓰여진 비석은 전체 높이 160㎝로, 8각대석(八角臺石) 위에 규형(圭形)의 비신(碑身)을 하고 있으며, 조선 영조(英祖) 17년인 1741년 충청도관찰사였던 조영국(趙營國)이 주선한 ‘신라효자향덕정려비(新羅孝子向德旌閭碑)’로 보존이 가장 잘 돼 있습니다.
 
효는 만행의 근본 역대 최초의 효자향덕비 사진
 
그리고 그 옆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윗부분이 절단돼 정확한 시기를 알기 어려운 높이 40㎝, 너비 40∼50㎝, 두께 33㎝인 옛 비석이 놓여 있습니다.
 
비석에는 ‘之閭(지려)’, '丑三月日重立(축삼월일중립)' 등의 글귀가 남아 있어 정려비임을 말해주고 있고 ‘重立(중립)’이라는 글씨를 보면 경덕왕 당시의 것은 아닌 듯하나 비석의 형태와 형상, 비석의 전후좌우에 남아있는 통일신라기 초석(礎石) 등을 기준으로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통일신라 때의 것이 아니라 새로 세워진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답니다.
 
향덕은 효성이 지극하여 한반도 최초로 정려(旌閭)를 내려받은 인물로 효행 정려의 선례를 기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겠습니다. 현재 공주 충남역사박물관 아래 효심공원에는 이비들의 모사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효는 만행의 근본 역대 최초의 효자향덕비 사진
 
우리나라 최초로 내려진 효자 향덕의 비가 소학동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 옥룡동 기관단체협의회가 앞장서 비각 주변을 가꾸고 2019년 첫 추모제를 준비해 제1회 향덕추모제를 치르기도 했답니다.
 
효는 만행의 근본 역대 최초의 효자향덕비 사진
 
"삼국유사"에는 향덕이 ‘향득사지(向得舍知)’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지(舍知)는 신라 17관등 중 13위 4두품에 해당하는 관등이긴 하나 향덕이 원래 4두품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추측하기보다는 포상 후의 신분 상승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러한 향덕의 이야기는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한반도 최초의 효행 포상 사례로서, 유교적 윤리의 수용과 그 시행의 초기적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하겠으며 향덕의 이야기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기록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비각은 1741년에 관의 서리 오막(吳幕)에 의해 다시 세워진 것이라고 하고 원래 비각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주초석이 곳곳에 놓여 있는데, 지금의 정려각보다 폭이나 넓이가 2배 정도 아니겠나 하는 추측을 해 봅니다.
 
그 외에도 공주에는 효자비가 많은데 충남 공주시 소학동 76-6 공주 소학리 효자향덕비 외에도 바로 곁에 효자 이기원 정려도 있으며 공주 충남역사박물관 아래 효심공원도 함께 둘러본다면 참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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