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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2019.05.12(일) 10:58:08도희(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모란꽃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의 오월은 고택의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모란은 부와 장수를 상징하는 꽃말로 양반가의 저택에 심었다는 일설이 있다. 추사고택은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께서 영조 대왕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는 바람에 하사받은 명당이다. 300년 된 이 고택은 처음에는 충청남도 각54개의 고을에서 기부금을 받아 54칸으로 건립했으나 1970년대에 재보수하면서 아쉽게도 34칸으로 줄여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추사고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랑채는 주로 바깥 양반께서 책을 읽거나 손님을 접대하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고택 기둥마다 걸린 주련에는 추사체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사랑채 벽에 걸린 국보 180호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과 제사 우선 이상적 간의 변함없는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자연에 빗대어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하여 학예(學藝)일치에 다다른 작품이라고 한다. 모란꽃 사이에 서 있는 해시계는 화강석 돌기둥으로 만들었고 그림자로 시계를 측정했다고 한다. '석년'이라는 추사체는 아들 김상우가 쓴 것으로 전해진다.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추사 김정희는 1786년 당시 병조판서를 지내던 경주 김씨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6월 3일에 추사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가뭄이 들어서 우물이 메마르고 산천초목이 시들었는데, 추사가 태어나자마자 우물이 되살아나고 시들었던 산천초목이 되살아났다는 탄생 설화가 있다.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조선시대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그리고 경주 김씨 세 당쟁의 파벌 속에서 추사는 윤상도의 옥사 사건으로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하러 가게 된다. 9년이라는 제주 유배기간 중에도 추사 김정희는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살라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한다.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말씀 중에 "가슴 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생전에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고 열 개의 벼루를 밑창내었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추사고택 주위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글씨와 그림, 그리고 첫째 부인 예안 이씨와 둘째 부인 한산 이씨의 합장묘가 있다. 이외에도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와 조선시대 최초 열녀 화순옹주 정절문이 있다.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추사 김정희가 24살 때 청나라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자제 군관의 자격으로 갔다가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제자의 인연을 맺고 청나라에 유행하던 고증학과 실사구시에 입각한 실학을 완성했다. 그의 스승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가 거슬러 올라가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 후기의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워냈다.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추사고택 정원에 해마다 피고 지는 꽃들도 아름답지만 격랑의 세월 속에서도 선비의 정신을 잃지 않고 문화의 꽃을 피워낸 선조의 정신을 되돌아 보는 일도 의미로운 일이다.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모란의 향기가 그윽한 추사고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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