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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로와 한국 최초 여성화가 나혜석 운명적 만남

예산 수덕여관에 남겨진 두사람의 미술혼과 체취... 그 여적을 돌아보다

2018.07.14(토) 12:53:54유병양(dbquddid88@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수덕사 일주문. 여기를 지나 왼쪽에 선미술관과 수덕여관이 있다.

▲ 수덕사 일주문. 여기를 지나 왼쪽에 선미술관과 수덕여관이 있다.


길가의

▲ 길가의 소망 돌탑


선미술관과 수덕여관을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 선미술관과 수덕여관을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해탈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천재화가 고암 이응로.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여성 문학가인 나혜석.
우리 충남 도민들은 홍성의 이응로는 잘 알아도 나혜석이 누군지는 잘 모를 것이다. 나혜석은 경기도 수원 사람인데 여성계에서는 화가, 문학가로서도 유명하지만 근대기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던 선각자로서도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다.
특히 경기도 수원에서는 근대기 수원출신으로 최고의 인물로 꼽는 분이기도 하다.
 
이응로와 나혜석, 이 두사람은 서로 어떤 인연이고 어떤 사이일까.
오늘 예산 수덕사로 가서 새롭게 조명되는 두사람의 인연에 대해 충남도민들께 알려드리고자 한다.
 
예산의 유명한 고찰 수덕사에 가면 일주문에서 2010년에 지은 선(禪) 미술관을 지나 좌측에 경내에 시선을 끄는 작은 초가집 한 채를 만날 수 있다.
절의 부속건물은 아닌 것이... 사찰의 경우 대개 일주문을 지나게 되면 적어도 수백미터 이상 걸어가야만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나 기타 전각을 만날 수 있기에 이건 분명 절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건물이다.
그래서 이 건물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수덕사에 가는 관광객이나 등산객들 중 일부는 이 건물의 존재를 모른채 수덕사나 덕숭산만 오르고 내려와 돌아간다.
 
하지만 이것은 수덕여관이라는 유명한 건물이다.
   

선 미술관에서 수덕여관으로 오르는 길. 저기 보이는 초가집이 수덕여관이다.

▲ 선 미술관에서 수덕여관으로 오르는 길. 저기 보이는 초가집이 수덕여관이다.


이응로와 한국 최초 여성화가 나혜석 운명적 만남 사진


수덕여관 전경

▲ 수덕여관 뒷마당 전경


수덕여관으로 들어가는 문

▲ 수덕여관으로 들어가는 문
수덕여관 안채와 전경

▲ 수덕여관 안채와 전경


이곳 수덕여관에서 이응로와 나혜석이 운명적 만남을 갖고, 나혜석은 이응로에게 유럽 특히 프랑스 미술계의 특징과 미술트렌드 등을 설명해 주었다.

▲ 이곳 수덕여관에서 이응로와 나혜석이 운명적 만남을 갖고, 나혜석은 이응로에게 유럽 특히 프랑스 미술계의 특징과 미술트렌드 등을 설명해 주었다.


이응로는 프랑스와 미국 등을 두루 여행하고 돌아온 나혜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유럽행에 대한 꿈과 유럽 미술을 배우고 싶어하는 강한 동경을 품게 됐다.

▲ 이응로는 프랑스와 미국 등을 두루 여행하고 돌아온 나혜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유럽행에 대한 꿈과 유럽 미술을 배우고 싶어하는 강한 동경을 품게 됐다.


나혜석과 이응로에 대한 신문기사

▲ 나혜석과 이응로, 그리고 수덕여관에 대한 지역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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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덕여관에 미술관을 짓고싶어 했다는 고암의 이야기를 쓴 신문기사


충남 홍성의 자랑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암 이응노 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1959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거처한 곳이다. 6·25 동란 때 피난처로도 사용하였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으로 옮기기도 했다.
건물은 'ㄷ'자형 초가집이며, 정면 5칸이 길에 접해 있다. 반대편으로 각각 6.5칸과 4칸이 ㄷ자형 날개를 이룬다.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에서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로 새긴 것이 여관 북쪽 귀퉁이에 남아 있다.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다.

그리고 특히 이 수덕여관이 더욱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불교에 심취해 묵었던 집이기도 할뿐더러 오늘날의 이응로 화백을 있게한 산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응로 화백과 나혜석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나혜석이 누구인지부터 알고 가야 한다.
우리 충청남도 인물과 문홰재 등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고, 또한 도민리포터 코너를 통해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그곳에 연루된 인물에 대해서는 약간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서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오늘 조금 소개해 본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로, 근대적 여성 해방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자 이를 문학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문학가이기도 하다.
나혜석은 1896년에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그의 아버지는 일본 식민 통치기에 용인 군수를 지내는 등 지배 계층에 속하는 부유층이었다.
그녀는 일본에서 유학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교사생활도 하면서 당시 조선의 가부장적인 사회환경을 거세게 비판하는 등 여성 계몽 운동에 뛰어든 선각자적 인물이었다.
특히 1919년에는 3·1운동 당시 김마리아, 박인덕, 김활란 등 여성 운동가들과 함께 비밀 집회를 열다가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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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덕여관 복원 기념비


이응로가 수덕여관 뒷뜰에 새겨놓은 악각

▲ 이응로가 수덕여관 뒷뜰에 새겨놓은 악각


수덕여관을 나오며 볼수있는 석상. 이 두 남녀의 원주인공은 누구일까?

▲ 수덕여관을 나오며 볼수있는 석상. 이 두 남녀의 원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녀는 외교관이었던 남편 덕분에 만주와 유럽 등지에서 2년 동안 여행했고, 급기야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가서는 파리에 체류하면서 그곳 문물과 그림의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유럽과 조선이 완전히 다른 유형의 부부 관계와 결혼 생활을 직접 보고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받아 한국에 돌아와서는 더욱 강하게 남자중심사회의 인습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런 자유분방한 사고와 생활 덕분에 이혼 등의 고초를 겪은 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했고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애호가들은 작품을 폐기했다고까지 한다.
결국 나혜석은 경제적 어려움과 세상의 조소를 견디다 못해 1937년 수덕사로 들어가게 되고 이곳 수덕여관에 머물며 오랫동안 그림도 그리고 머물다가 1948년에 죽었다.
나혜석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나혜석과 고암 이응로 선생은 어떤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일까.
 
이혼 등의 고초를 겪은 나혜석이 1934년 이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수덕사에서 수행 중이던 친구 일엽 스님을 찾아왔다. 나혜석은 당시 수덕사 만공 스님에게 출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스님은 “임자는 중 노릇할 사람이 아니야”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나혜석은 수덕사에 장기 체류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나혜석은 작품활동을 하며 선승처럼 단촐하고 조용하게 살면서 승복을 입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또한 그림을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예술인들을 만나며 5년 정도 머물렀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로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림에 대한 공부를 하고자 이곳을 자주 왕래했다.
결국 이응로에게 나혜석은 파리 신문물을 알려준 인생 선배이자 그림에 대한 대단한 스승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수덕여관을 찾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미술관인 선 미술관. 수덕여관 바로 왼쪽에 있으면서 이응로의 작품도 상당수 전시중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미술관인 선 미술관. 수덕여관 바로 왼쪽에 있으면서 이응로의 작품도 상당수 전시중이다.


수덕여관쪽에서 바라본 선 미술관.

▲ 수덕여관쪽에서 바라본 선 미술관.


선 미술관 야외조각품.

▲ 선 미술관 야외조각품.


이 남자는 무슨 번민에 싸여 있는걸까.

▲ 이 남자는 무슨 번민에 싸여 있는걸까.


야외조각품

▲ 야외조각품


서양화에 대한 대 선배이자 스승이면서 나이로는 누님과도 같은 그와 많은 교류를 갖던 이응로는 수덕여관과정을 들었고 1944년 결국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여 다음 부인인 박귀희 여사에게 그 운영을 맡긴다.
아마도 파리에 대한 환상과 그림 열정을 더욱 강하게 고취시켜 주었던 스승 나혜석과의 인연과 그녀의 체취가 남겨진 수덕여관을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워 그랬는지 모른다.
이응로는 이곳을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고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담는다.
1944년에 나혜석이 수덕여관을 떠난 후 여기저기 떠돌다 1948년에 죽었다. 그후 1958년 이응로는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수덕여관, 이응로, 나혜석과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이후 이응로는 박귀희 여사와는 이혼을 하게 되고 박인경씨와 결혼하는데, 하루아침에 과부가 된 박귀희 여사는 이응로 화백에 대한 변치 않는 애정으로 평생 수덕여관을 지키며 살았다.
 
오늘의 수덕여관을 돌아 보며 당대에 신문물을 동경하며 살았던 한 선각자적 여성와 그로부터 그림에 대한 영감을 얻고 대한민국 최고의 반열에 오른 화가 이응로를 되새겨 본다.

수덕여관 전면에는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두었는데 이 문을 중심으로 좌우 입면이 다르다. 한쪽은 방 앞쪽으로 바닥이 높은 베란다를 설치하였고, 반대쪽은 베란다 없이 유리창문을 달아두었다. 이 정면 모습이 농가와 달리 보이게 하는 이유이다.   

선 미술관 제1전시실

▲ 선 미술관 제1전시실


제2 전시실

▲ 제2 전시실


문자도

▲ 문자도


화조도

▲ 화조도


호피장막도

▲ 호피장막도


화접도

▲ 화접도


 고암 작품 전시당의 방명록

▲ 이응로 작품 전시의 방명록


고암의 문자초상

▲ 이응로의 문자초상


이응로 작품

▲ 이응로 작품


이응로 작품

▲ 이응로 작품


이응로가 일본스승 송림 계월로부터 받은 서찰

▲ 이응로가 일본스승 송림 계월로부터 받은 서찰


이응로의 글씨. 프랑스 제자 20여명과 부인 박은경여사가 기증한 작품

▲ 이응로의 글씨. 프랑스 제자 20여명과 부인 박은경여사가 기증한 작품


이응로 작품.

▲ 이응로 작품.


수덕여관 앞 오른쪽 옆에는 1969년 작곡가 윤이상을 비롯한 예술인, 유학생들이 이응로와 함께 서독에서 유학할 당시에 비롯된 동백림사건으로 1967년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 나와 요양하며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적 추상으로 표현한 작품인 암각화가 있다.
이 작품은 덕숭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수덕사의 장엄함과 여승의 청아함, 수덕여관의 초가지붕, 노송, 그리고 그 앞의 계곡과 함께 어우러져 그 멋을 더하고 있다.
 
현재 선 미술관에는 전시실 2곳이 있다. 이응로 화백과 수덕사 방장을 지낸 원담스님의 작품을 전시한 곳과 일반 미술가들의 상설 전시관이다. 관람료는 없다.
해마다 수덕사 방문객은 60만명쯤 되는데,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미술관과 수덕여관을 찾는다고 한다. 수덕사뿐만 아니라 미술관과 수덕여관에 대한 관심도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천년 고찰을 감상하고 미술작품도 볼 수 있는 곳. 그리고 천재 화가 고암 이응로선생의 작품과 미술혼을 감상함은 물론, 개화기에 치열한 삶을 살았던 신문물의 우리나라 최초 여성화가의 삶과 편린이 체취처럼 남아있는 곳.

이곳 수덕여관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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