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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예산 대흥슬로시티 입구에 세워진 33개의 비석

2017.08.08(화) 14:42:32도희(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대흥 슬로시티 입구에는 대흥의 500년 역사를 증명하는 33개의 비석이 줄지어 늘어 서 있다. 예당저수지 축조로 수몰되는 지역에 있던 비석들을 현재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율곡 이이의 친구로 개혁주장을 펼쳤던 대흥 현감 유몽학 선정비가 1578년에 세워져 가장 오래되었다. 충청남도 암행어사로 이름을 떨친 권념 대동법확장 시행에 노력한 영의정 김육 영세불망비 등이 있다. 비석들을 통해 조선 시대 지방관으로 부임했던 인물들이 남긴 대흥의 역사를 알 수가 있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특히 동학 농민군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과 1904년 일제가 조선의 황무지개척권을 50년간 양도하도록 강요하자 이를 만대 상소하고 규탄선언서를 발표했던 이건하 선생 영세불망비 등은 지역사는 물론 근현대사를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비석들이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대흥면에서 최초로 건립한 대흥 현감 유봉학 비석을 시작으로 30개는 화강암석으로 만들어졌고 나머지 근현대에 건립한 3개의 비석은 보령에서 유명한 벼루만드는 재료인 검은색 오석비석으로 눈에 금방 뛴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비석 중에 가장 오래된 비석은 현감 유몽학 선정비로 1578년에 7월에 건립하였다. 유몽학이 대흥 현감으로 재직 할때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는 선정을 베풀어 이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흥군에 속현으로 예산현, 덕산현이 있었다. 1974년에 일제가 예산군으로 통합하여 현재 예산군은 2개 읍 10면에 이른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비석 중에 3번째 로 오래된 이 비석은  1660년 5월에 대동법실시를 주장한 영의정 김육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다. 지대석 위에 거북이 모양의 귀부와 비분이 새겨진 비신 모자 모양의 이수(개석)이 덮여 있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대동법 실시를 충남에서 제일 먼저 시행할수 있게 한 분이다. 효종(1649)이 즉위하자 백성들을 위해 대동법실시를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 김육의 대동법 실시로 사림파의 김집, 김상현과 대립하였지만, 그의 확고한 신념으로 1651년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하였고 전국으로 대동법을 확산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대동법이란 집집마다 토산물을 내는 공납 대신에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보유량에 따라 쌀로 내는 방법이다. 김육은 농민의 고충을 덜어 주고자 선조에게 '대동법'을 제안하여 방납의 비리와 공납의 폐단을 바로잡았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군수 이후 창세 애민 창덕비는 1895년 7월에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을 토벌하고 진압에 성공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다. 예산군에서 동학농빈군들이 삽교읍 목시마을에서 집결했고  관작리 전투지와 박인호 대접주의 유허지 그리고 1895년에 세운 삽교읍 춘암상사박인호 유허비가 남아있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1897년 11월에 건립한 군수 구후 완희 창덕 선정비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공을 세워 대흥 군수에 임명된 구완희선정비로 대흥에서 민심을 수습하고 덕을 베풀어 이에 대한 선정비며 친일파로 활동했다. 라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광주 김공 지태 송덕기념비는 1935년 12월에 건립하였고 광시 대붕 금광을 경영하던 동학 농민 출신 김지태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혜택을 입은 백성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하였다. 대흥역사를 증명하는 비석거리를 찬찬히 걸으며 비석 해설문을 읽다가 보면 삶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누구는 예산군에서 발발했던 동학 농민군을 진압했다는 이유로 대흥현감이 되셨고 선정비를 세워 드렸다. 그리고 동학 농민군 출신 김지태님은 금광을 경영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고 하여 송덕기념비를 세워 드렸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일설에 의하면 이 세개의 비석중에 한개는 자기가 자기를 위해 세운 비것이 있다고 한다. 비석은 사후에 후세의 사람들이 그의 은덕과 공적을 기리는 차원에서 제워 주는 비석인데 자신을 위해 세웠다고 하니 잔잔한 소문이 일고 있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1580년 현감 문익주는 임진왜란 전 대흥 현감 시절 선정을 베풀어 이를 기리기 위해 세워준 선정비다. 우측의 비석은 군수 심공 재진 성정비로 정조 8년(1781) 년에 2~5월까지 진휼에 힘써 이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대흥군은 1681년 (숙종7) 신양면 황계리와 녹문리 경계에 있는 박산 서쪽 태봉에 조선 18대 현종의 태실을 봉축하며 군으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위 두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흥현감님을 예산군수로 부르게 된 역사적 배경을 알수가 있다.

대흥의 500년 역사 증명하는 비석거리 사진

작년에 송광사 선진지 견학을 갔다가 그 지역에서 공덕을 세운 관료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절 입구 언덕 위에 나란히 서 있는 비석들을 보았다. 언덕 계단을 올라가는 입구 양옆에 큰 비석을 반으로 갈아 소맥돌오 사용하고 있었다.

기이한 모습에 그 지역 해설사에게 궁금증을 물어 보았더니, 하는 말이 조선 시대에 마지막 암행어사 이면상이 그 지방에 갔다가 백성들의 돈을 거두어들여 자기가 자신을 위해 공덕비를 세우고 갔다는 것이다. 훗날 사람들이 그 비석을 끌어내려 반으로 갈라 소맥 돌로 삼아 후세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가슴이 서늘했다.

물론, 백성들을 잘 보살펴서 세운 비석도 있지만, 역사의 흐름상 백성들의 궁핍함을 돌보기에 앞서 자기 안위와 명예를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자신을 위해 세운 비석은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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