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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을의 관아 대흥동헌의 여름

백제역사 유적지기행

2016.09.13(화) 11:22:22도희(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옛 고을의 관아 대흥동헌의 여름 사진 
대흥 동헌은 고을의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던 건물로 생활처소인 내아(서헌)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쪽에기 때문에 동헌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수령이 주재하는 관청의 본건물을 말합니다. 이곳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74호로 조선 태종 7년(1407)에 창건되어 1914년에 대흥면사무소로 개조하여 사용되다가 1978년에 해체.복원 정비되었습니다.

대흥 동헌은 정면 6칸(14.4m), 측면 2칸(4.8m), 처마높이 3.3m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기본 구조가 잘 남아 있고, 예산 지역 현존하고 있는 유일한 관아건물로 1405년에 건립된 대흥 향교와 함께 대흥역사를 증명하는 건축물로서 역사적. 건축학적 보존가치가 있습니다.

옛 고을의 관아 대흥동헌의 여름 사진 
대흥 동헌 옆에 있는 면사무소는 원래 고을수령이 거처하던 살림집으로 내아라고 불렀습니다. 1979년에 대흥면사무소 자리를 대흥동헌으로 해체 복원하면서 이곳에 대흥면사무소 옮겨왔습니다. 원래 예산에는 예산군과 지금의 수덕사가 있는 덕산군, 대흥군 3개의 군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행정개편의 편리를 위해 하나로 통합하는 바람에 지금의 예산군 하나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옛 고을의 관아 대흥동헌의 여름 사진  
대흥 동원입구 좌측에 작은 누각 안에는 대흥마을에 살았던 실존 인물인 의좋은 형제 효제비가 있습니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던 이성만 이순 형제들을 위해 연산군 3년에 세운 비석입니다. 세종대왕은 즉위하면서 전국에 모범인물 41명을 선발하여 상을 내렸는데 이성만 이순형제가 일등을 하였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옛 고을의 관아 대흥동헌의 여름 사진 
동헌 입구에 있는 수령 200년이 넘은 느티나무는 이곳 관아에 업무를 보러오던 관료들이 타고 온 말을 묶어 두거나 천주교 박해때 천주교인들을 오랏줄에 엮어 이곳 나무에 묶어 대기하고 한 사람씩 차례로 동헌 뜰에서 심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이곳에 대기하던 교인들은 낮은 담장너머로 곤장을 맞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지레 겁을 먹어 더러 배교한 분들도 계셨다고 합니다. 이곳 마을에서 태어난 김정득 배드로 천주교 순교자가 있고 그런 이유로 얼마전에 천주교 성지가 들어와 조성 중에 있습니다.

옛 고을의 관아 대흥동헌의 여름 사진 
대흥 동헌 뒤뜰에는 영조 대왕의 11번째 화령옹주 태실이 있습니다. 태실은 조선 시대 왕가의 왕세자손들이 태어나면 태를 함부로 처리하지 않고 청자나 백자에 넣어 위 사진속의 돌그릇 모양 속에 귀중품과 함께 넣어 명산에 보관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일본 사람들이 태실을 훼손하고 귀중품들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태실을 보관한 명산을 태봉산이라고 합니다.

옛 고을의 관아 대흥동헌의 여름 사진 
19세기 후반에 조선의 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잡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1820~1898)의 척화비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의 승리 후에 전국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문호개방을 반대하는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치의 뜻을 펼쳤습니다.

척화비 내용은, "서양의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 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 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어린 아들 고종을 앞세워 10년간 섭정한 흥선대원군 국제적 역사의 새로운 흐름속에서 쇄국정치와 국가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서양사상이 왕권중심의 조선 유교사상을 어지럽힐 것을 두려워하여 천주교를 박해하고 쇄국정치를 단행했습니다. 결국 그의 쇄국정치는 국제관계를 악화시키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드일 기회를 놓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의 섭정은 끝이 났고 며느리 명성왕후와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역사가 전개되었습니다.
 
옛 고을의 관아 대흥동헌의 여름 사진 
대흥 동헌 뒤뜰에서 바라보이는 봉수산은 백제의 부흥군이 최후를 맞이한 2.4m의 임존성이 있는 백제인의 혼이 서린 곳입니다. 이 성에서 공주와 부여가 80리쯤 떨어져 있기에 백제가 수도를 웅진과 사비로 옮긴 후에 수도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옛 고을의 관아 대흥동헌의 여름 사진

무구한 세월 속에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 곳에는 인걸은 온데간데없고 연꽃이 피고지고 씨앗을 맺고 있습니다. 역사유적지를 둘러보며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명절을 맞이하여 가족과 함께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도 삶을 재조명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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