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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이삼장군의 고택

2016.02.02(화) 16:02:07맛난음식(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인좌의 난은 얼핏 들어본 적이 있는데 그 난을 평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인과 만나러가는 길목에서 오래된 고택이 하나 있길래 들어가 보았는데요. 그곳이 조선시대 최후의 분무공신 책봉을 받은 이삼 (1677 - 1735) 장군의 고택이더군요. 무과에 급제한 장군이지만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함평이씨 이삼 장군의 후손들은 파평윤씨의 윤증 가문과 사제 관계뿐만이 아니라 혼반 관계로까지 엮여져 있다고 하더군요.

 

이삼장군 고택으로 가는 길목의 장승

▲ 이삼장군 고택으로 가는 길목의 장승


장승이 하나씩 서있는 것을 본 적은 있는데 이렇게 모여서 묶이듯이 있는 장승 묶음은 처음 봅니다. 
얼굴 인상으로 보아서 마을은 제대로 지켜줄 것 같네요.
 

이삼장군 고택

▲ 이삼장군 고택


이삼장군 고택은 마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1703년 26세 때에는 별시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며 선전관(宣傳官)으로 출사하게 된 사람입니다. 이곳으로 들어가려면 본채 정문인 솟은 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삼장군 고택 비

▲ 이삼장군 고택 비
 

민속자료 제 7호 이삼장군 고택 비석도 있습니다.

당당해 보이는 고택

▲ 당당해 보이는 고택


들어와보니 다시 기단이 있고 그 위에 고택의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지금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오지 말라는 글이 적혀져 있습니다. 이삼장군은 논산 상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요.
 

고택의 앞마당

▲ 고택의 앞마당


앞마당이 꽤나 넓은 편입니다. 이삼장군은 책도 좋아해서 공부도 좋아했지만 어릴때부터 힘도 남달랐다고 합니다. 즉 머리도 좋고 힘도 좋은 이상적인 그런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죠.
 

부인의 내조

▲ 부인의 내조


이삼장군의 일화를 보니 역시 결혼을 잘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들게끔 합니다. 

이삼장군은 자신의 부인 유씨를 스승이라고 부를 정도로 남편을  잘 포용하고 잘 내조하면서 바로 잡아주었다고 합니다. 이삼장군이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의 뒤에는 바로 부인 유씨 때문이라고 이삼장군은 말하고 있답니다.
 

고택안에 고목

▲ 고택안에 고목


이삼장군이 초기 관직생활을 할때는 그 유명한 장희빈이 있을때랍니다. 

인현왕후의 복위문제를 비롯하여 장희빈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등등 노론과 소론이 서로를 죽일것처럼 싸울때였죠. 이때 이삼에게 노론들은 누명을 씌우기도 했답니다.
 

고택안의 속살

▲ 고택안의 속살


영조는 형인 경종의 도움등으로 잘 살아남았는데요. 결국 노론이 밀어줘서 왕이 된 이후에 영조를 부정하는 반란이 몇번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인좌의 난이죠.
 

고택 앞에 논

▲ 고택 앞에 논


이인좌가 이끄는 반란군은 비교적 한양에서 가까운 청주에서 한양을 공격하려고 시도하는데요. 그곳에서 이삼장군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죠.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것 같습니다. 이삼은 1735년에 세상을 떠나는데요.이에 영조는 “나의 좋은 장수를 잃었구나. 상례와 부의를 예에 의해 시행하고 후손을 녹용하라”고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삼장군 고택은 충남 논산시 상월면 주곡길 47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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