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전체기사

전체기사

충남넷 미디어 > 소통 > 전체기사

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

대한 적십자 110주년 기념 'MY story is our history'에 나의 봉사이야기 담겨

2015.11.24(화) 03:27:41김기숙(tosuk48@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 사진


대한 적십자는 창립 11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110년간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현장에서 헌신하신 봉사원들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와 소중한 경험을 담은  MY story is our history 를 출간 하였다.

이 에세이집은 현재 인터넷과 서점 등을 통하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판매 수익금은 북한 어린이와 여성을 위해 사용한다고 한다. 적십자 110주년 역사 사진도 수록 되어 있다 (249쪽)

이 에세이집에는 나의 글도 실렸다.  내가 새터민 봉사를 하면서 얻은 딸과의 이야기를 담은 '가슴으로 낳은  딸'이 그것이다.

내가 어려서 어머니는 남에게 베풀고 봉사를 하면서 살라고 항상 말씀을 하셨다.
"무엇으로 어떻게 봉사를 해요?" 하고 물으면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가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봉사라고 하셨다. 옛날에 먹을것이 없을 때 어머니는 둑에다 호박을 심어놓고 거름을 주고 길러서 배고픈 사람에게 죽이라도 쑤어 먹으라고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들도 쑤어 주셨다. 어머니는 호박죽이 맛있다고 우리들에게 주면 우린 안 먹었다. 호박죽이라도 안먹은 날엔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난다. 살아계시면 백살, 옛날 어머니는 어디서 봉사를 배워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을까.
나도 큰 봉사는 못해도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에 봉사는 내몸이 허락 하는 날 까지 하려고 합니다.


제목  :  가슴으로 낳은 딸

어느 따뜻한 봄날 나들이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탈북자 한 명이 아파트에 살러 온다고 청소를 하라고 한다. 수석동 적십자 회원들은 탈북자가 한 명씩 올 때마다 청소를 하고 도우미 봉사도 한다. 서산이 좋다고 소문이 났는지 많이들 오신다. 세 살 먹은 아기를 업고, 또는 육십세 이상 되는 어른들이 다양하게 그 무서운 경계 속에서도 용케 자유를 찾아오는 것이다.

그 중에는 배 아파 낳지 않은 우리 딸도 있다. 아주 똑똑하고 야무지다.
삼년 전 일이다. 내가 청소를 한 아파트에 아무날 아무시에 탈북자가 한 명 오는데 봉사 담당은 내 차례다. 짐을 받아놓고 안내 도우미를 한다. 시청, 병원, 시장 등 그들이 살아가는데 불편 없이 도우미를 하는 것이다. 적십자회원들은 이런 봉사를 하니까 참 운이 좋다. 크게는 국제적십자운동의 구성으로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있고, 국제적십자연맹 각국 적십자사 순으로 이어져 몇 단계를 거쳐 나는  20년 근속 장기 적십자봉사원이다.

다 같은 한국 사람이건만 왜 그리도 궁금하던지 빨리 보고 싶었다. 보고 싶던 탈북자가 왔는데 실망을 했다. 머리를 뒤로 올리고 얼굴엔 주름투성이에 깡마른 할머니였다. 실망을 했다기보다 너무도 야위여서 늙어보였기 때문이다. 하나원에서 주었다는 살림도구가 들어있는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왔다. 하나원은 새터민들이 묶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우라나라에 대하여 공부를 하는 곳이다.

시간이 흘러 날이 가고 나는 서산 땅을 알려 주느라고 자주 만났다. 시장도 걸어가고 동사무소 병원 등 알려 주는 대로 척척 말귀도 잘 알아듣는다. 자유를 찾아 한국에 오느라고 얼마나 쫓겨 다녔는지 처음에는 말문을 잘 열지도 않는다. 나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주어진 봉사만 한다. 어느 날은 그녀가 된장이 얼마나 먹고 싶은지 된장을 담는다고 하면서 시장으로 메주를 사러 간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이북에서 된장 담아봤슈? 하니까 ”담아 봤수다“ 하는 것이었다.
“나도 아직 된장을 안 담고 메주로 그냥 있는데 메주를 주면 된장을 담을거예요?” 하니까
“담아 보겄수다” 한다. 6·25 때 넘어오신 분들이 이북 말을 할 때면 너무 억양이 심해서 재미로 사투리를 따라서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자유를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이북 사투리를 쓰니까 어디를 가나 저 사람들은 탈북자란 것을 알 수가 있다.

메주 큰 덩어리 두 개와 소금, 고추, 숯도 많게 갖다 주었다. 항아리는 플라스틱 그릇을 사서 담겠노라고 한다. 메주를 주니 그녀는 마음을 나에게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우리는 메주로 인하여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머리를 삭뚝 자르고 굽실굽실하게 파마도 했다. 일 년이 지나니까 살도 좀 붙었다. 나이가 들어보이던 그녀는 아주 젊은 우리 딸 또래가 되었고 우리 딸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머리를 자르니까 나이도 안 먹어 보이너먼 진작에 자를 것이지 왜 머리를 안 잘랐어?” 물어보니까 타국에서 옮겨 다니느라고 한갓지게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이제 겨우 사십대 초반!
주름이 많아 늙어 보인다고 눈자위에 수술을 하고 한국 멋쟁이가 되어 자동차도 사서 몰고 다닌다.
“앞으로 서로 허물없이 딸하고 엄마 하자” 나의 제안에 쾌히 승낙을 하는 것이었다. 나라에서 이젠 탈북자가 아닌 새터민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다문화는 떳떳하게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놓고 마음 놓고 살지만 자유를 찾아 고생을 하고 넘어온 새터민들은 얼굴을 드러내 놓지도 못하고 음지에서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며 살고 있다.

딸은 명절 때만 되면 고향에 부모님이 생각나서 잠이 안온다고 밤새 나한테 문자를 보내어 외로움을 달랜다고 했다. “너 오늘밤 고향생각 어지간히 나는구나?”
“네, 어마니!”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나도 울적한다.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 해주면 좋겠니?
“괜찮아요 어마니”
탈북자라고 누가 얕보기라도 할 까봐 빨리 여기 표준말로 바꾸라고 하기도 했다. 우린 이렇게 정이 들었다.
딸은 한국에서의 고생은 고생도 아니란다. 생활력이 얼마나 강한지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번다. 우리 집에 가끔 오는데 별건 아니지만 이것저것 먹으라고 챙겨주면 “엄마 고마워요” 한다.

배 아파 낳은 딸 두 명에 더 큰딸이 생겼으니까 꾸러미는 세 개가 되었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엄마! 저 왔어요” 라고 부르면서 살갑게 한다. 예의도 밝아 어디 한곳 미운데도 없다. 값 비싼 옷은 아니지만 올 봄에는 옷도 사다 주어서 잘 입고 다닌다. 저나 나나 마음은 메이커에 비하랴! 집에 왔다 가면서 이북 말로 “년세가 있으니까 어마니 이젠 일 좀 그만 하시라요” 한다.

서운해서 뒤가 안 보일 때까지 쳐다본다. 자유가 무엇인지 부모, 형제, 남편 자식을 떼어놓고 와서 살면서 때론 외로움 견디지 못해 달 밝은 밤이면 달과 얘기를 한다고 한다.
 
내가 보는 저 보름달은 이북에서도 부모 형제들이 볼 것이고 자유를 찾아 왔으니까 용서해 달라고 한단다. 나는 이북에서도 “적십자란 말을 들어 보았어?” 하니까 말로만 들었지 적십자가 봉사한다는 전혀 몰랐다고 하면서 진즉에 한국에 올 것을, 이북에서는 남침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한국에 오니까 북침이라고 모든 걸 속고만 살아왔다고 한다. 어서 통일이 되어야 가족을 만날 수가 있단다. 6·25전쟁을 겪은 어른들이 두고 온 고향산천 부모형제를 그리다 돌아가시었는데 이제는 자유를 찾아 수시로 한국에오는 새터민들이 있어 고향을 그리면서 살아가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땀과 흙이 묻은 손으로 전화를 받는다.
“엄마!
“응,”
요즘 더운데 무엇 하세요?”
“풀과 씨름 한다” 다음 주에 제가 가서 풀을 매줄게요 제 몫을 남기세요. 말만 들어도 고맙다.
몸 아끼지 않고 일도 잘 한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나와 인연이 된 우리 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나도 달에게 빌어본다.

 

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 사진

 적십자 봉사 20년 표창장과 함께 저무는 2015년 이네요.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