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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으로 물든 윤봉길의사 사적지

2014.11.07(금) 12:26:33계룡산(ccy6645@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요즘 윤봉길의사 사적지 주변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광현당과 저한당의 굵은 은행나무는 세월의 무게만큼 풍성하게 노란 입김을 뿜어내며 바람에 펄럭이는 수많은 태극기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윤봉길의사 사적지는 충절과 예향의 고장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하고 윤봉길의사의 구국의지와 민족혼이 서려 있는 곳으로 사적 제229호로 의사의 영정이 모셔진 충의사와 윤의사가 탄생한 광현당, 성장기에 살았던 저한당, 농촌부흥운동을 한 부흥원, 유물을 전시하고 교육.체험시설을 갖춘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윤봉길 의사는 본명이 우의(禹儀)이고 별명이 “봉길”인 의사는 1908년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島中島)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고, 성장한 집은 저한당이라 이름하였다.
11세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에 일본인 선생에게 불만을 품고 자퇴하였다가 13세에 한문공부를 시작하여 매곡 성주록(梅谷 成周錄) 선생으로부터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9세에 신문화 습득과 농촌부흥에 노력하여 “농민독본(農民讀本)”을 편찬하여 가르치고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였다. 1930년에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집을 떠나 망명하여 김구(金九)선생이 이끄는 상해 애국단의 일원이 되었다.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상해사변전승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수뇌급 수십명을 죽이고 부상을 입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 여러 곳에 보여 주었다.
의사는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19일 25세의 짧은 일생을 일본 삼소정공병(三小井工兵)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유해를 우리나라로 모셔와 효창공원에 안장하고, 윤의사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가족과 함께 윤봉길의사 사적지를 찾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친 의사의 고귀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본 받아 나라사랑의 계기로 이어지길 소망해 본다.

저한당의 은행나무와 윤봉길의사 동상

▲ 저한당의 은행나무와 윤봉길의사 동상
 

충의사

▲ 충의사
 

충의사의 윤봉길의사 근영

▲ 충의사의 윤봉길의사 영정
 

주차장에서 본 충의사

▲ 주차장에서 본 충의사
 

윤의사가 탄생하여 4세까지 살았던 도중도의 광현당

▲ 윤의사가 탄생하여 4세까지 살았던 도중도의 광현당
 

광현당과 저한당을 잇는 도중교

▲ 광현당과 저한당을 잇는 도중교
 

윤의사가 4세 이후부터 성장기에 살았던 저한당

▲ 윤의사가 4세 이후부터 성장기에 살았던 저한당
 

윤봉길의사 동상

▲ 윤봉길의사 동상


윤봉길의사 기념관

▲ 윤봉길의사 기념관


기념관

▲ 기념관
 

기념관 내 전시실

▲ 기념관 내 전시실
 

윤봉길의사 어록탑

▲ 윤봉길의사 어록탑
 

사적지 안내도

▲ 윤봉길의사 사적지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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