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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오늘(7월8일~9일까지)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세계4대해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과 한산대첩을 다시 보다

2014.07.09(수) 16:18:10임중선(dsllew87@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번달 30일,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영화 한편이 상영됩니다.
뭐, 충남넷 도민리포터가 특정 영화 홍보하자는 뜻은 아니고요. 워낙 우리 대한민국의 민족사에 길이길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숭상과 흠모의 대상이자 신적 존재에 관한 인물을 조명한 영화이니 소개를 안할수 없네요.

영화제목 ‘명량’.
금세 아시겠죠.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한 뒤 기껏 남은 전선 12척으로 300여척의 왜군을 박살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그 유명한 해전 말입니다.
 
기대가 되죠?
아이들 키우는 가정에서는 이런 영화 꼭 같이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오늘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제가 명량해전 이야기를 먼저 한 이유도 여기에 있네요. 오늘이 무슨 날이냐면 임진왜란 당시였던 1592년 7월8일부터 9일까지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이틀간 한산도에서 왜선 73척중 59척을 수장시키면서 이 땅을 유린했던 왜놈들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었던 그 유명한 한산대첩을 치른 날입니다.

그래서 한산대첩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명량해전 영화를 먼저 소개한 것이구요.
 
자, 한산대첩을 치르러 한산도로 가 볼까요. (사실은 충남아산의 현충사입니다)
 

 

기념관 겸 전시관

▲ 기념관 겸 전시관


전시실 천정의 화살 미니어처

▲ 전시실 천정의 화살 미니어처


세계 각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들에게 세계 4대 해전을 꼽아 가르칠때 충무공의 한산대첩이 포함된다는 사실, 이것도 참 중요한 일입니다.

세계 4대해전이란 테미스토클레스 제독의 살라미스 해전, 하워스 제독의 칼레 해전, 영국 넬슨 제독의 트라팔카 해전, 그리고 우리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한산해전)을 꼽습니다.
뭐 가끔 미국에서는 자국의 미드웨이 해전을 이 안에 슬그머니 끼워 넣기도 하지만요.
 
1592년 임진년 7월 8일. 이 바다에 드넓은 날개가 펼쳐졌죠. 거대한 학의 날개, 조선 수군의 학익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조선 수군의 완벽한 승리, 왜선 73척 중 59척을 바닷속에 처박아 넣으면서 9000여명의 왜군을 수장시킨 대승이었습니다.
 

기념관을 둘러 보는 관람객들

▲ 기념관을 둘러 보는 관람객들


 

 

어떤 전사가(戰史家)는 이 한산대첩을 일컬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의 수륙병진 계획에 사형선고를 내린 해전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정도면 한산대첩이 갖는 의미와 상징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 끝.
 
이순신과 조선 수군. 그들은 과연 어떻게 이겼을까요?
이거 도민리포터가 소설 쓰는것 아닙니다. 전란 속에서 수많은 전장의 기록을 남긴 충무공의 일기를 조선 정조대왕이 전부다 모아서 편찬한게 바로 ‘난중일기’죠.

이 난중일기에 나와있는 내용, 즉 이순신 장군의 전투상황 보고서 그대로를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풀어서 해례한 내용들입니다.
 

조선수군이 사용했던 황자총통

▲ 조선수군이 사용했던 황자총통


당시에 사용했던 일종의 수류탄. 폭탄 안에 쇠조각을 잘라서 넣고 사용했다고 합니다.

▲ 당시에 사용했던 일종의 수류탄. 폭탄 안에 쇠조각을 잘라서 넣고 사용했다고 합니다.


학익진에 대해 충무공은 장계에서 학의 날개를 펼친 듯한 진법으로 일본군에 압승을 거두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한산도를 가운데 두고 당포에는 조선 수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견내량에는 일본 수군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견내량은 통영과 거제 사이의 바닷길인데, 최소 폭 180m(최대 600m), 길이 4km의 좁은 물길입니다.
 
이미 해상에서 충무공의 수군에게 연이은 패배를 당한 도요토미이기에 일본의 정예장수들에게 연합수군을 구성해 조선 수군을 먼저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황.
바다의 제해권을 두고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일전이 예고된 것이죠.
 

조선 수군의 자랑, 거북선

▲ 조선 수군의 자랑, 거북선


충무공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거북선 2종류중 하나의 단면도

▲ 충무공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거북선 2종류중 하나의 단면도


또 다른 두번째의 거북선

▲ 또 다른 두번째의 거북선


실제 사용한 거북선의 축소 단면

▲ 실제 사용한 거북선의 축소 단면


 

 

운명의 날, 충무공은 좁은 바다 견내량은 200여척의 함선이 전투를 치르기에 적합치 않아 한산도 앞 넓은 바다를 선택했습니다.
이곳은 지형이 험한데다 숨어있는 섬 또한 많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조선수군은 당포를 출발해 한산도를 지나 견내량 쪽으로 항진했습니다. 이때는 비장의 신무기 거북선과 주력전선 판옥선, 그리고 보급선 등으로 구성된 80여척이 넘는 대함대였죠.
 
드디어 조선 수군의 선봉대와 치열한 접전이 이루어진지 30여분, 공격을 퍼붓던 조선 함대 선봉대가 뱃머리를 돌려 물러나자 일본군은 전 함대가 돛을 올리고 추격해왔습니다.
그리고 좁은 수로 견내량을 벗어나자 마침내 넓은 한산도 앞바다가 나타났습니다.
 
‘짜자~잔!!!!!!!!!!!!!!!!!’

조선 수군의 주력전선인 판옥선

▲ 조선 수군의 주력전선인 판옥선


일본전선 아다케부네

▲ 일본전선 아다케부네


조선 수군의 막강 전선(戰船)이 일제히 학의 날개로 진을 펼쳤고 순식간에 수많은 조선 함대에 에워 싸인 왜군함대는 이제 독 안에 든 쥐꼴이 됐습니다.

육전에서 사용하던 전형적인 포위-격파-섬멸전의 형태입니다. 전 병력이 사방에서 포위하여 일제히 공격을 가하는 것이죠.

조선 수군의 대형총통(요즘의 함포)들이 발포를 시작했고 포위망에 갇힌 일본군은 조선의 총통 앞에 그야말로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전은 길게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일방적인 압승이었죠. 탁월한 지휘관의 최고의 선택 앞에 왜군이 덤빌 엄두를 못낸채 궤멸 당했으니까요.
 

충무공의 난중일기

▲ 충무공의 난중일기


사부유서. 즉 임금이 지휘권을 가진 장수에게 징병 등의 권한을 적어 내려 보낸 명령서.

▲ 사부유서. 즉 임금이 지휘권을 가진 장수에게 징병 등의 권한을 적어 내려 보낸 명령서.


충무공의 장검

▲ 충무공의 장검


왜군의 조총

▲ 왜군의 조총


영의정 증직교지. 정조가

▲ 영의정 증직교지. 정조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장수에게 그동안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못해준 것은 잘못"이라며 뒤늦게 충무공을 영의정에 봉한다는 내용을 담은 문서


 

 

충무공 영정

▲ 충무공 영정


임진왜란 발발 3개월, 수세에 몰렸던 조선 수군이 일본에게 가한 일격이었고 조선 백성 전체에게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한 대 해전이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쓰면서 가슴이 떨리고 벌름거려서 주체하기 힘들정도였습니다.
우리 민족사에 충무공 같으신 분들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후손으로서 감당키 어려울 정도의 행복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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