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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기록문화의 정수 공주박물관 '묘지석'

2014.06.17(화) 14:52:34임중선(dsllew87@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디에선가 중요한 고대 유적과 수많은 매장 문화재가 발견되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국보급의 금제, 은제 장식품과 각종 생활 도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헌데...
이 유물이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어 어떤 연유로 땅속에 묻혔는지 전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럴 경우 박물관 전문가, 역사학자들이 얼굴을 맞대고 머리를 짜 냅니다. 당장 유물에 방사성연대 측정을 통해 언제 만들어진건지 유물제작 시기를 추정하고, 그 연대에 맞는 다른 유물들을 비교 하면서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 갑니다.

아울러 발굴된 유물의 특징과 기존에 이미 발굴되어 있는 유물을 비교하면서 그 쓰임새, 사용자, 유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국보가 되기도 하고 보물, 지방문화재 등의 등급도 매겨지게 됩니다.
우리 선조들의 소중한 역사적 유물이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세밀한 고증과 평가 작업이 이뤄지게 되는데, 그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겠죠.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여러 가지 절차를 다 생략하게 만드는 핵심적 증거, 즉 그 유물이 만들어진 시기와 유물의 주인, 그리고 유물의 쓰임새 등이 기록된 뭔가가 함께 출토가 된다면 이건 역사학자들에게는 ‘대박 중의 대박’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유물의 제작시기와 의미 등을 한번에 알수 있으니까요. 특히 유물은 제작 시기가 오래될수록 그 가치가 더 커지기 때문에 유물이 만들어진 시기를 알수 있는 증거가 함께 발견된다는 것은 유물발굴에 가장 핵심이라 할수 있죠.
 
현재 국립 공주 박물관에는 1971년 공주시 송산리고분군에서 발굴된 무령왕릉과 대전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문화재를 포함해 국보만 무려 18점, 보물 4점 등 4만여 점의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소장된 것은 무령왕릉 덕분인데요.
이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수많은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중 정말 중요한 한가지가 바로 ‘묘지석’이라는 것입니다.
 
묘지석이란 그 묘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묘지가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인지, 그리고 묘지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까지 적혀 있는 돌판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의 차원에서 볼때 이 작은 돌판 하나가 갖는 의미는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겠죠.
 
무령왕릉에서는 그 능이 백제 무령왕 부부의 것이라는 내용을 포함해 (당연히 만들어진 시기를 알수 있는 것까지) 간지도와 매지권까지 새겨져 있는 국보 제 163호 묘지석이 출토되었습니다.

작은 돌판 하나지만 이것이 국보가 될수밖에 없는 이유는 앞에서 모두 설명이 되었고, 또한 이 돌판 하나는 기록문화의 진수라고도 할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록문화의 정수 공주박물관 '묘지석' 사진


왕의 묘지석 앞면입니다.

묘지석 부분확대

▲ 묘지석 부분확대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알기 쉽게 따로 표기한 묘지석 원문

▲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알기 쉽게 따로 표기한 묘지석 원문


내용은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께서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 모시며 기록하기를 이와같이 한다”
실로 놀라운 기록이죠.
이 기록만으로 무덤의 모든 비밀은 단박에 풀리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록문화의 정수 공주박물관 '묘지석' 사진


그리고 이것은 왕의 묘지석 뒤에 새겨진 간지도입니다.
간지도란 풍수지리상 무덤의 위치, 방위표, 능역도 등을 그려 넣은 것입니다.
 

놀라운 기록문화의 정수 공주박물관 '묘지석' 사진


왕비 묘지석 부분확대

▲ 왕비 묘지석 부분확대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알기 쉽게 따로 표기한 왕비 묘지석 원문

▲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알기 쉽게 따로 표기한 왕비 묘지석 원문


이어서 왕비의 묘지석입니다.
내용 역시 “병오년(526년) 11월백제국왕태비가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 서쪽의 땅에서 빈전을 설치하여 삼년상을 지내고 기유년(529면) 2월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지내며 기록하기를 다음과 같이 한다”입니다.
 

놀라운 기록문화의 정수 공주박물관 '묘지석' 사진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알기 쉽게 따로 표기한 매지권 원문

▲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알기 쉽게 따로 표기한 매지권 원문


아울러 왕비 묘지석 뒤에는 매지권이라는게 새겨져 있습니다.
매지권이란 능토지신에게 무덤터를 사기 위해 무덤을 만들 당시 실제 사용되던 돈을 토지신에게 지급하ㅗ 땅을 산 증명서를 작성한 것입니다.
 
당시 땅을 구매한 증표인데 당시에 이런걸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입니다.
내용은 “돈 1만매를 들여 을사년(525년) 8월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강천하의 이천석의 여러 관리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하여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고 증명을 삼으니 앞으로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라고 돼 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무령왕릉의 모든 비밀과 유물의 수수께끼는 한번에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날 위대한 선조들이십니다.
 

놀라운 기록문화의 정수 공주박물관 '묘지석' 사진


놀라운 기록문화의 정수 공주박물관 '묘지석' 사진


그리고 공주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는 거대한 돌 그릇 보물 두점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석조’라 하고 보물 제148호입니다.
이는 백제시대 석조로, 사찰에서 연꽃을 담아 장식했던 것이라 합니다.
원래는 공주시 반죽동의 대통사 터에 공주반죽동석조(보물 제149호)와 함께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말구유로 쓰기 위해 옮겨가 제자리를 떠나게 되었다죠. 참 내...
 

놀라운 기록문화의 정수 공주박물관 '묘지석' 사진


놀라운 기록문화의 정수 공주박물관 '묘지석' 사진


놀라운 기록문화의 정수 공주박물관 '묘지석' 사진


석조를 받치고 있는 받침 기둥은 일본군에 의해 깨어져 없어지고, 이후 반죽동 석조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원기둥에 연꽃을 둘러 새긴 모습입니다.
석조는 굽이 높은 사발 모양으로 입구 가장자리에 굵은 돌기를 돌렸고 바깥 면에는 2줄의 작은 띠를 돌려 새기고, 띠 위에 일정하게 연꽃을 장식하였는데 반죽동 석조에 비하여 많이 닳지 않아 문양이 훨씬 뚜렷합니다.
 
대통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 7년(529)에 창건된 사찰이므로, 이 석조는 그 제작년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백제 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석조의 형태나 연꽃무늬는 백제의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므로 그 가치는 반죽동석조와 아울러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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