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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의 교양필수였던 시조창은 '전통의 대중음악'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 부여 내포제시조

2014.02.26(수) 15:20:55남준희(skawnsgml2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산수 수려하고, 맑은 하늘 아래 선비들이 부채로 공기를 저으며 한수 읊조리던 시조가락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조창입니다.
 
“기러기 산이로 잡아 정들이고 길들여서/ 임의 집 가는 길을 역력히 가르쳐두고/ 밤중만 임생각 날제면 소식전케 하리라” 여창질음시조 한 수가 청중들이 빼곡이 운집한 내포제시조 전수관 안을 가득 메운다. 이어 “바람아 부지마라 휘어진 정자나무 잎이 다 떨어진다/ 세월아 가지마라 녹빈홍안이 공로로다/ 인생이 부득항소년이니 그를 설워하노라”라는 남창질음시조가 차분한 소리로 청중들의 가슴을 휘어잡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 세대에는 이런 시조창을 듣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방송에서는 아이돌 가수의 랩과 힙합만 들려주고 있고, 시조창을 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무형문화재 선생님들과 거기에 관심 갖고 계신 몇분을 빼고는 아예 다 사라졌기 때문이죠.
 

부여읍 관북리에 있는 내포제시조 전수관

▲ 부여읍 관북리에 있는 내포제시조 전수관


전수관 옆 기념비

▲ 전수관 옆 기념비


소동규 선생의 흉상

▲ 소동규 선생의 흉상


내포제시조 시비

▲ 내포제시조 시비


부여에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 내포제시조 기능보유자 김연소 선생님을 뵙고 왔습니다.
 
“시조창이란 시조시(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를 가사로 하여 노래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시절가, 시절단가, 단가라고도 하는데 700∼800년 세월을 이어온 우리 겨레의 얼과 정서가 담긴 노래죠.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거 말하면 잘 못 알아듣지만요. 하하하”
 
김연소 선생님께서 간단하게 시조창에 대해 말씀을 해 주시면서 무형문화재가 되시기까지 그간의 내력을 설명해 수십니다.
 
“우리 부여의 내포제시조는 1930년대 소동규 선생께서 윤종선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서 전수해오던 시조창입니다. 그것을 다시 충남 시조인들을 중심으로 시우회(時友會)를 만들어 구전으로 이어 오다가 내포제 시조를 악보로 만든 것입니다. 저는 김원실 선생님 밑에서 배우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김연소 선생님의 내포제시조 실연.

▲ 김연소 선생님의 내포제시조 실연.


양반들의 교양필수였던 시조창은 '전통의 대중음악' 사진

▲ "얼쑤~ 덩더꿍"


양반들의 교양필수였던 시조창은 '전통의 대중음악' 사진

▲ "부소산 저문비에, 황성이 적막허고.... 얼쑤~"


내포제시조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내포제시조는 충청남도 서북부지역의 시조창입니다. 내포라는 말은 충청도에서 서산, 당진, 예산, 홍성을 가리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음계는 3음의 계면조(슬프고 처절한 느낌을 주는 음조)와 5음의 우조(맑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음조)로 되어 있고 중간에는 가락을 올리지 않아 안정감을 유지하고, 끝에는 떨어뜨려서 여운을 남기는게 특징입니다. 또한 가성을 쓰지 않고, 꾸밈음을 많이 사용하고 있죠. 악기 없이 장구나 무릎장단으로 일시적 연주를 하기 때문에 초장과 중장 끝장단에서 5박자가 줄어들기도 해요.”
 
시조는 충남의 부여에만 있는게 아닐텐데 다른 지방에는 어떤 시조창이 있는지 여쭈어 봤습니다.
 
“시조는 단아하고 우아한 꽃창포를 닮았다고도 합니다. 시조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명제지요. 그래서 시조창이 우리 민족에게 사랑받았던 것입니다. 시조엔 경상도의 영제, 전라도의 완제, 서울과 경기의 경제가 있고 이곳 부여에는 내포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포제라고 해서 이게 무슨 말인가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게 충청도 부여지역의 시조와 시조창을 일컫는 고유명사인셈이지요. 지역 시조의 이름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는 4대지역의 시조창이 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4대시조창, 즉 4제라고 합니다.”
 

내포제시조 악보

▲ 내포제시조 악보


2012년 당시 시조창경연대회 장면

▲ 2012년 당시 시조창경연대회 장면


시조라고 하면 아무래도 양반이 떠오릅니다. 머슴이나 일반 백성 서민들은 시조를 읊조릴 여유가 없었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양반들은 다같이 시조와 시조창을 잘 했을까요?
 
“충청지방의 내포제시조는 이 지역 양반들의 필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조 한 수 부르지 못하는 사람은 양반이라도 양반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군요. 시조창 정도는 해야 양반행세를 할 정도였으니 오늘날로 말하면 교양필수과목정도의 위치가 되었다고 할수 있겠네요”
 
김연소 선생님이 시조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어떤건지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배우기가 어려울 것 같고, 또한 엄청 재미있는 형태도 아닌데다... ‘굳이 이걸 배워서 뭣에 쓰나’ 하는 의문도 가졌을법 하니까요.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풍류와 가락을 즐길줄 아는 국민입니다. 멋을 안다는 것이죠. 지금이야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음악이 대중음악이지만 그때는 시조와 시조창이 대중음악이었을거 아닙니까. 나도 엄청나게 큰 사명감이나 시조창에 대한 매력을 느껴서라기 보다는 원래부터 내 몸속에 흐르는 피가 국악 쪽과 인연이 있었나 봐요. 처음에는 국악과 사물놀이를 몇 년 배웠는데 그 과정에서 소동규 선생님으로부터 시조도 배우게 된게 인연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때의 우리의 대중음악은 국악이었잖아요. 거기에 취해본거죠. 우리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께서 농사를 지으며 고단했던 육체적 피로를 노동요를 통해서 풀었듯이, 나도 시조창을 하면서 무한한 마음의 평화를 느꼈어요. 그러면서 ‘아, 이거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가서니까 흥미가 느껴지고 창이 입에서 나오더라고요.”
 

역대 전수자 선생님들의 사진

▲ 역대 전수자 선생님들의 사진


각종 상장

▲ 각종 상장


김연소 선생님께 우리 충청도 내포제시조의 자랑좀 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4제 중에 지금 이 시조의 맥을 가장 잘 이어가고 꽃 피우고 있는 것이 우리 내포제 시조예요. 왜냐하면 시조의 일곱 개의 곡을 다 가지고 있는 유일한 시조거든요. 사실, 제가 다른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 봤는데 명맥이 끊기거나 후계자가 없어서 고민중인 경우가 많아요. 솔직히 밥벌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문화를 보존하기가 어려워요. 보유자도 있어야 하고, 이수자도 있어야 하고, 전수자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내포제시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지금까지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전승시키고 있는것만으로도 큰 자부를 느낍니다. 요즘도 시조를 배우러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선생님의 말씀처럼 국악이 우리의 대중음악이었듯, 시조 역시 대중은악의 한 갈래였습니다. 시조창을 일컫는 내포제시조는 그렇게 오랜 세월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불러온 고유의 대중음악입니다.
자, 그럼 이제 시조 한 수 읊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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