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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떠올려보게 하는 금산 백령성

2014.02.05(수) 11:52:30임중선(dsllew87@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산16번지, 해발 759m의 백암산 정상에 이미 낡고 오래된 성(城)곽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이 백제시대에는 남이면 대양리였다고 하는데 이 산자락에 금산 백령성이라 부르는 백제시대 성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흔히 사진에서 보는 유럽의 멋진 풍경속 성곽은 실로 그 자체가 예술이며 아름답기 그지없죠. 예를 들면 독일의 노인슈반슈타인 같은 성 말이죠.
중세 유럽의 성곽이 이렇게 아름다웠고 화려했던 이유는 그것이 외침을 막는 기능 외에 당시 부유했던 영주들이 성을 하나의 거대한 전원주택처럼 꾸몄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떠올려보게 하는 금산 백령성 사진


백령성지 표지석

▲ 백령성지 표지석. 저만치 성곽이 보입니다


성곽 위로 태양이

▲ 성곽 위로 태양이.


하지만 금산에 있는 우리 백제시대에 쌓은 백령성은 그런 멋진 풍경속의 낭만적인 성곽은 아닙니다.
오로지 외침을 막고자 했던 하나의 목적, 외침을 막음으로써 고을의 백성과 내 땅을 지키고자 했던 우국충정의 단일 목적을 위해 쌓은 것입니다.
 

성고가에 올라 내려다 본 석벽

▲ 성곽에 올라 내려다 본 눈 쌓인 석벽


목

▲ 목곽시설 안내문


백령성의 위치를 보자면 금산군 제원면과 추부면을 지나 충북 영동과 옥천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형태는 산 정상 부분을 둘러 쌓은 테뫼식이며, 성의 둘레는 현재 서벽,·남벽, 동남벽 등 400m만이 남아 있습니다.

성 내부

▲ 성 내부


성 북쪽 내부

▲ 성 북쪽 내부


성에서 본

▲ 성에서 본 허물어진 벽


성벽은 서쪽에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바깥쪽 벽의 높이 5.8∼6.9m, 안쪽벽 2.5∼3m, 너비는 4m정도입니다.
성안에서는 백제시대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이 나왔으며 산봉우리에는 봉화를 피웠던 장소가 있어 봉수대가 설치되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 1990년5월24일에 충남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됐습니다.
 

테뫼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벽과 산기슭

▲ 테뫼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성벽과 산기슭


석벽으로 옹벽을 쌓은 성

▲ 가파른 급경사를 이용해 석벽으로 옹벽을 쌓은 성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떠올려보게 하는 금산 백령성 사진


 

성벽과 가파른 급경사

▲ 성벽과 가파른 급경사
 

경사도가 더 커집니다

▲ 경사도가 더 커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곽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듣는 성벽 축성방식인 ‘테뫼식’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궁금증을 가졌을법한 테뫼식이 과연 뭘까요? 그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성벽 축조 방식은 크게 테뫼식과 포곡식으로 나뉩니다.
먼저 테뫼식은 산꼭대기를 평평하게 다듬고 산기슭을 수직으로 깎아내린 것처럼 보이지요. ‘테뫼’의 뫼는 산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니까 산에 테를 두른다는 뜻인데 이런 성 안에서 방어를 할 경우 거의 난공불락의 산성이라고 얘기합니다.
공성전(침입자가 성을 공격하고, 수비자가 성 안에서 방어하는 전투) 때에는 이런 경우 공격자의 희생이 엄청 크기 때문에 방어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포곡식은 골짜기를 둘러싼 산줄기를 따라 성벽을 쌓아서 문을 통하지 않으면 성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운 구조라고 합니다.
그 유명한 고구려 안시성이 포곡식입니다. 이 성들은 산성의 나라 고구려 사람들의 슬기로움과 자존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하죠.
 
 

성 정비를 위해 나무를 깎아 놓은 곳

▲ 성 정비를 위해 나무를 깎아 놓은 곳


성의 역사를 간략히 한번 살펴보죠.
백제시대에 견훤이 남이면 대양리(大陽里)에 경양현을 설치하고 금산의 서남방면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수축한 것입니다.
이후 6·25전쟁 때 이곳이 전라북도 운주와, 충남 논산으로 왕래하는 요충지였기에 북한 공비들이 장기간 은거하면서 국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기도 합니다.

성 안쪽은 넓은 산판길 같은 평지가 있으며 성 안에는 백령성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는 찾아내지는 못했는데 백령성에서 능선을 타고 1km쯤 올라가면 산봉우리에 봉화대가 있어 진악산의 관양봉 봉수대와 서로 교신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주 큰 규모도 아닌, 이 작은 성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성에서 본 동쪽

▲ 성에서 본 동쪽
 

성에서 본 서쪽

▲ 성에서 본 서쪽
 

성에서 본 남쪽

▲ 성에서 본 남쪽
 

성에서 본 북쪽

▲ 성에서 본 북쪽


이곳에 백제말기에 이렇게 작은 성을 쌓았다는 것은, 신라와 접경지대에 있는 이 지역을 방어하거나 진출을 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은 돌을 쌓은 석성으로 당시는 매우 견고했을 것이란 생각이고, 성의 주변은 경사가 무척 가파릅니다.
만일 이곳에서 적과 교전을 했다면, 아무리 강한 적이라고 해도 쉽게 성으로 기어오를 수가 없었을 것 같았습니다.
 
성곽을 들러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봤습니다.
과거에 성이란 전적으로 외침을 막고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는데 단순히 그렇게만 본다면 성에 대한 설명으로는 약간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성 안에서 그곳 수령을 중심으로 모든 정치적 결정과 사람들의 경제적인 삶,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활동과 문화가 함께 이루어졌을테니까요.
예를 들어 서산의 해미읍성 같은 경우죠. 워낙 크고, 평지이고 주변이 논밭을 포함한 일상 평지였으니 실로 성 안에서 많은 것들이 이뤄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으로서의 총체적인 역할을 하기 보다는, 단순히 적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목적으로만 쌓은 성이 이 백령성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나라와 고을과 백성을 위해 쌓았고, 이젠 세월이 흘러 거의 폐허가 된 오래된 성.
여기저기 흩어진 성벽을 축조했던 돌들이 비탈진 성벽 밑으로 쏟아져 내려,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케 합니다.
 
성곽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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