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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세시 복조리 마을은 내고향 이랍니다

구룡동 경로회 원조 복조리 마을로 지정

2014.01.19(일) 17:11:22김기숙(tosuk48@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당진시 면천로 구룡동은 나의 고향이자 복조리로 유명 했던 동네다. 결혼해 살면서 물 맑고 산 좋은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지켜 언제나 제자리에서 수호신 역할을 해주는 정류소 옆에 있는 큰 대 바위는 변함이 없다. 옛날에 복조리는 동네 주민들의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복조리는 우리나라 세시 풍속으로 정월 초 하룻날 아침에 복조리를 쌍으로 묶어서 한쪽에는 찹쌀, 한쪽에는 멥쌀을 담고 덤으로 엿과, 실을 얹어 우리가 자주 드나드는 방문위에 못을 박아서 걸었다. 복이 들어오라는 의미란다. 그리고 한 달을 지낸 후 이월 초하룻날 아침에 그것을 쏟아서 밥을 하고 우리들은 엿 먹는 재미 또한 솔솔 했다.

세월은 흘렀어도 고향에 복조리만큼은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 정월도 가까워 오는데 구룡동 경로회(회장 박홍)70여 명은 점차 사라져가는 복조리 세시풍습을 살리고자 작년부터 다시 재현을 시작했단다.

세시풍속이 자꾸만 사라진다. 대개가 정월 대보름 안에 이루어지는 풍속들이다. 쥐불놀이, 그동안 날리던 연 날려 보내기, 보름 밥 아홉 집 먹기, 나이 수대로 섬 밥 먹기, 등 단순한 세시 풍속에도 사람들은 모두가 즐겁게 살았다.

난는 단숨에 고향으로 향했다.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고 모든 모습이 변해버린 고향에서 옛것을 찾으려고 가던 길을 자주 멈춘다. 왕매미가 목청껏 울어 주던 미루나무 가로수와 굴곡이 심했던 웅덩이 신작로는 나에게는 원망스럽던 길이다.

자갈뿐인 신작로는 삼태기로 자갈을 날라다 오그렸다 폈다 하는데 어린 나는 이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르고 했다. 주로 봄에 봄바람이 불 때면 더 했다. 자갈을 못하러 가면 벌금을 냈다. 반마다 한 집씩 몇 미터 재서 나누어 주었다.

남들은 집안에 남자들이 있으니까 별 문제가 없지만 우리 집은 엄마와 나 둘이서 해야만 했기 때문에 힘이 무척 들었다. 둘이 살은 것은 아니다 동생들은 어리고 오빠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 벌러 간다고 서울로 갔다. 나는 줄을 잘 못서는 바람에 어머니와 일만 했다.

경로당에 도착하니까 쪼개지 않은 산죽과 잘 갖추려진 조리 살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고향 떠나 오래 만에 뵙는 어른들 잘 몰라 뵈어서 참 죄송했다.

그래도 바뀌지 않는 것은 동네 안에 있는 지명 유래다. 지명이 나는 참 재미있다. 어쩌면 한동네에 골자만 넣어서 이름을 지었는지 말이다. 당골 · 과골 · 감나무골 · 큰골· 작은골 · 됫골 · 수청골이다. 나는 감나무가 골에서 살았다.

농사일이 끝나면 부업으로 조리를 만들기 시작 했다. 몇 집 빼고는 동네주민이 다 복조리를 만들어서 단합도 잘 되었고 마을이 유명세를 탔다.

복조리 만드는 대는 산죽(시누대)으로만 만든다. 산죽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십리 밖에 나가서 산죽을 사왔다.

다른 부품이 하나도 안 들어가고 산죽만으로 하는 수작업은 거치는 과정도 많았다. 산죽을 뾰족한 칼로 여러 갈래 쪼개서 일주일간 말렸다가 물에 하루 담가서 골고루 가늘고 얇게 칼로 훑어 낸다. 산죽 살이 부드러워야 만들기가 좋다는 것이다. 손힘이 있어야 하고 발로 밟고 씨줄과 날줄 간격도 잘 맞추어야 한다.

어린 초등학생들부터 어른들 모두 다 조리 만드는 일에 함께 했다. 깊은 겨울 밤 밖에는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방에는 산죽 훑는 소리와 조리 엮는 소리만 들릴 뿐! 밤 가는 줄도 모른다.

밤새 만든 조리는 차곡차곡 열 개단위로 묶어 지게에지고 장날을 택하여 팔러간다.
열심히 만들어서 복조리를 팔면 어설프게 농사지은 한해 수입보다 많은 집도 있었다. 논을 사고, 송아지도 사고, 학생들 사친회비도 주고, 그야말로 두어 달 부업치고는 효자 상품이었다. 섣달그믐이 되면 조리 만드는 일은 끝이 나고 사람도 해방이 된다.

푸리스틱 조리가 나오고 돌을 고르는 정미기까지 나오자 복조리는 아주 설 곳을 잃었다.
젊어서 7분 만에 조리 하나를 뚝딱 만들었다는 할아버지는 복조리를 만들면서 신바람이 났다. 하도 오래 만에 해보니까 손이 느리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고향에 복조리는 어른들을 통해 다시 찾아 왔다. 감사하다. 복조리 원조 마을이 된 계기는 옛날에 외지에서 들어오신 할아버지가 갈 곳이 없어서 우리 집에 머물면서 복조리를 만듦으로 그 후로 동네에 퍼졌다고 한다. 모두다 객지에서 살기 때문에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복조리만 즐겨 만들던 후배가 있었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복조리를 벗어나 산죽으로 모든 액세서리를 만들어 기능보유자가 되었단다. 돌아오는 길에 복 많이 받으라고 덕담 까지 하시면서 복조리를 주셨다. 나도 올 해에는 복조리를 걸어야겠다.

전통세시 복조리 마을은 내고향 이랍니다 사진

원조 복조리라는 안내. 

전통세시 복조리 마을은 내고향 이랍니다 사진

산에서 잘라온 시누대

전통세시 복조리 마을은 내고향 이랍니다 사진

조리살의 길고 짧은것을 구분하고 있다.

전통세시 복조리 마을은 내고향 이랍니다 사진

전통세시 복조리 마을은 내고향 이랍니다 사진기능 보유자가 산죽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회관에 기증했다. 

전통세시 복조리 마을은 내고향 이랍니다 사진

산죽으로 잘라 만든 꽃 어떻게 이렇게 만들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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