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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충남의 장인7] 줄로 대단합 농심 이끈 ‘기지시줄다리기’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제75호 <기지시줄다리기 명인> 구자동 선생 인터뷰

2013.11.23(토) 11:50:57남준희(skawnsgml2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어렸을적에 학교 운동장에서 했던 운동회. 그때 절대로 빠지지 않은 운동 종목은 줄다리기였습니다.

다수가 참여할수 있고, 특유의 단합된 힘을 발휘하며 그 덕분에 다같이 동참해 하나가 되는 협동단결의 결과를 이끌어 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충청남도에는 이 줄다리기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온 무형문화재가 있습니다.
당진의 기지시줄다리기.

1982년6월1일에 국가 무형문화재 제 75호로 지정되어 현재 줄다리기보존회가 만들어져 있고 줄다리기 박물관이 함께 건립되어 있습니다.
기지시줄다리기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로는 장기천 선생님과 구자동 선생님 두분이 계시고, 구본원 유위영 선생님이 기능을 전수받고 계신 조교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국가 무형문화재 제 75호 기지시줄다리기 명인 구자동 선생님(71세)을 뵙고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기지시줄다리기 국가 무형문화재 제75호 구자동 선생님

▲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에서 뵙고 인터뷰중이신 국가 무형문화재 제75호 구자동 선생님


[기획-충남의 장인7] 줄로 대단합 농심 이끈 ‘기지시줄다리기’ 사진

▲ 구자동 선생님의 무형문화재 지정서(왼쪽)


“짚의 무게만 40톤이나 됩니다. 볏단 4만단이 나오려면 40마지기(8000평)의 논에서 벼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게 바로 기지시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줄입니다. 어미어마하죠? 그것도 한번 만들어서 두고두고 쓰는게 아닙니다. 1년에 한번 쓰고, 해마다 새로 제작해서 저희 보존회 기념관 정문에 마련된 대형 전시관에 보관해 둡니다.”
 
구자동 선생님은 우선 기지시줄다리기의 연혁과 유래 등을 여쭙는 도민리포터에게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줄의 위엄에 대해 먼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줄다리기용 줄 제작과정

▲ 줄다리기용 줄 제작과정(사진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 제공)


오

▲ 작년도 정월대보름때 줄다리기 행사 장면(사진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 제공)


줄다리기의 가장 큰 의미인 마을 주민들의 대동단결

▲ 줄다리기의 가장 큰 의미인 마을 주민들의 대동단결(사진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 제공)


- 기지시줄다리기가 시작된 기원은 어떻게 되나요?

“원래 줄다리기의 가장 큰 기본 목적은 주민들의 화합과 민심수습이었다고 합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선조대왕 재임 초에 기지시 근처 바닷가에서 커다란 해일이 일었는데 그때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처음 시도됐던거라고 해요. 특히 기지시는 농어촌과 시장문화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곳이거든요. 이곳에는 틀모시를 사고 파는 큰 시장이 열렸는데 그때 베틀의 부분부분 부속품의 이름을 딴 마을 지명이 아직도 사용되는 곳이 많아요. 예를 들면 주변의 가시울, 반바지, 가마모시, 북단골 같은 마을 지명이 그런 대표적인 사례예요”
 

지난 백제문화제 당시 참여했던 줄(사진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 제공)

▲ 지난 백제문화제 당시 참여했던 줄(사진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 제공)


줄도 휴식중(사진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 제공)

▲ 줄도 휴식중(사진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 제공)


이렇게 시작된 기지시줄다리기는 1973년에 도지정 문화재가 되었고 1979년에 도지정 민속자료가 되었으며, 1982년에 드디어 국가지정 문화재로 승격됐다 합니다.
구자동 선생님은 20대초반에 입문하여, 87년에 이수자가 되었고, 88년에 전수조교가 되었으며 2001년에 보유자로 인정받으셨답니다.
 
- 줄다리기는 어떻게 편을 갈라 진행하나요?

“줄다리기는 원래 길쌈이라고도 하는데 농경의식의 하나인 일종의 편싸움 놀이죠. 저희 당진은 바다를 끼고 있기 때문에 줄다리기를 할때도 마을을 육지와 바닷가쪽 두 편으로 나누어 시작합니다. 어느쪽이 이기든 상관없이 다함께 상생 발전 번영하자는 화합의 줄다리기인데, 과거 초기의 기지시줄다리기는 생산의 의미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바닷가 쪽이 이기기를 은근히 바랐다고 합니다. 그래야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먹거리가 가장 급한 때이다 보니그런 듯 해요”


줄을 만들때 뼈대 역할을 하는 줄틀(보존회 박물관 전시중)

▲ 줄을 만들때 뼈대 역할을 하는 줄틀(보존회 박물관 전시중)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 정문에 전시중인 거대한 크기의 줄

▲ 기지시줄다리기 보존회 정문에 전시중인 거대한 크기의 줄


마치 용의 몸통 같은 위엄

▲ 마치 용의 몸통 같은 위엄


부연 설명을 더 해보죠.

줄다리기는 윤년 음력 3월초에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낸 다음 행해졌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당진의 지형이 지네형이라서 지네모양의 큰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줄의 길이는 50∼60m이며 지름이 1m가 넘는 경우도 있어 사람이 줄을 타고 앉으면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입니다. 줄이 커서 손으로 잡아당길 수가 없기 때문에 원줄의 중간 중간에 가늘게 만든 곁줄을 여러 개 매달아 잡아당기기 좋도록 만듭니다.

줄다리기 박물관

▲ 줄다리기 박물관에 전시중인 전통의 깃발들


'령(영)'자가 한문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깃발

▲ '령(영)'자가 한문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깃발


줄 위에 올라선 대장이 지휘를 하면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각 마을의 농악대는 빠른 장단으로 사람들의 흥을 돋웁니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은 이긴 쪽 차지가 되는데, 승부가 결정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칼로 줄을 끊어 간다네요.

끊어간 줄을 달여서 먹으면 요통이나 불임증에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실제 약효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래서”하는 마음의 치유방법인듯 합니다. 원래 병이란 마음에서 오잖아요.

이렇게 기지시줄다리기는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으로써, 줄다리기를 통한 농촌사회의 협동의식과 민족생활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앞으로 기지시줄다리기도 꾸준히 그 면모를 계승 발전 유지시켜 나가서 자랑스런 대한민국 전통문화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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