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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도 인정한 명장, 충장 남이흥 장군

정묘호란때 중과부적으로 패하자 화약궤에 불붙여 자폭 순절하신 비장한 충신

2013.08.19(월) 12:15:13임중선(dsllew87@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명장을 꼽으라면 곧바로 이순신 장군, 권율 장군, 강감찬 장군, 을지문덕 장군, 김종서 장군, 임경업 장군 등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중에 반드시 남이흥(1576∼1627) 장군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명장들은 우리 학생들이나 국민들이 대부분 다 아는 분들인데 사실 안타깝게도 남이흥 장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남이흥 장군은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 남유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조 35년(1602)에 무과에 급제 하고, 이후 인조때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당진에 있는 남이흥장군의 사당 충장사

▲ 당진에 있는 남이흥장군의 사당 충장사
 

충장사 편액

▲ 충장사 편액


 현재 충남 당진에는 남이흥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충장사가 있는데 장군의 유품을 간직하고 있는 모충관, 장군의 묘, 그리고 재실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남이흥 장군은 조선시대 무장으로 본관은 의령, 시호는 충장입니다. 
1602년(선조 35)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28세에 선전관 겸 비변사 낭청에 등용되었고  42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진주 목사로 제수 받았습니다.

 재임중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 임금은 공주로 파천을 해버렸습니다. 물론 국왕이 다치거나 죽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공주까지 내려간 상황에서 남이흥 장군은 장만 장군과 함께 혜음령(지금의 경기도 광탄)에 도착해 진을 쳤습니다.
 

남이흥 장군 아버지와 함께 받은 충신의 정려

▲ 남이흥 장군 아버지와 함께 받은 충신의 정려
 

정려각 편랙

▲ 정려각 편랙
 

정려 안에 걸려 있는 정려문

▲ 정려 안에 걸려 있는 정려문(충절에 대한 기록)
 

정려와 사당 옆에 있는 재실

▲ 정려와 사당 옆에 있는 재실


 당시 중군 대장의 직책으로 관군 4000명을 이끌고 이괄의 반란군 12000명과 대치하던 중 결국 지금의 무학재 고개에서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진무 1등공신이 되었고 종일품 품계와 연안부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이흥 장군의 남자다운 기개, 충신의 면모는 그 후에 더 크게 나타납니다.

 1627년 인조 5년에 36000명의 후금 군사가 조선을 침공해 온 사건, 정묘호란입니다.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후금의 군대를 맞아 남이흥 장군은 고작 3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안주성에서 혼신을 다하여 대적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수성이 불가하자 장군은 적군을 화약고가 있는 곳으로 유인한 뒤 화약에 불을 붙이고 성 안으로 들어온 많은 적들과 함께 자폭하여 순절하셨습니다.

장군의 유품이 전시돼 있는 모충관

▲ 장군의 유품이 전시돼 있는 모충관
 

중국에서도 인정한 명장, 충장 남이흥 장군 사진

▲ 모충관


 그렇게 장렬하게 생의 최후를 맞이한 분이 바로 남이흥 장군이십니다.

 정묘호란도 평정이 된 후 인조는 남이흥 장군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였고, 이후 또한 명나라 황제는 황제 궁 앞에 조선 남이흥 장군의 애국충절을 귀감토록 하는 특명을 내렸다 합니다.

 당시 조선을 침공 하였던 후금의 대장 또한 전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조선에 진정으로 충의가 넘치는 장군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라고 하였고, 이 내용은 훗날 청나라의 각종 기록에 남아 전해져 오고 있다 합니다.
 

중국에서도 인정한 명장, 충장 남이흥 장군 사진

▲ 남이흥장군의 묘
 

활짝 핀 들꽃이 장군의 충절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 활짝 핀 들꽃이 장군의 충절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남이흥 장군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왕명에 의해 사당인 충장사와 양세 충신 정려문을 내렸습니다.

 양세(兩世)란 장군의 아버지가 이미 임진왜란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기에 남이흥 장군과 함께 2세대에 걸친 충정을 기리고자 양세(兩世) 정려가 된 것입니다.

장군의 영정(유품 전시관인 모충관의 문이 닫혀 있어 이 자료는 문화재청 사진 자료입니다)

▲ 장군의 영정(유품 전시관인 모충관의 문이 닫혀 있어 이 자료는 문화재청 사진 자료입니다)
 

임금이 장군의 관을 덮어 주었던 곤룡포(문화재청 사진 자료)

▲ 임금이 장군의 관을 덮어 주었던 곤룡포(문화재청 사진 자료)
 

장군과 가족의 호패(문화재청 사진 자료)

▲ 장군과 가족의 호패(문화재청 사진 자료)


 현재 유품 전시관인 모충관에는 장군이 사용하시던 유품으로 구의 상하 한개, 대례복 1개, 호패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의란 전쟁 때 장군이 입던 갑옷인데 녹비로 된 것이고, 대례복은 인조의 하사품입니다.

 우리 고장에 잠들어 계신 충신이면서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던진 분. 우리 민족혼에 영원히 살아있을 표상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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