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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 독립선언문 인쇄는 누가 어디서 한지 아세요?

민족대표 33인 옥파 이종일 선생 기념관, 생가를 찾아

2013.08.11(일) 00:05:13남준희(skawnsgml2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8.15 광복절이 이제 5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시기만 되면 류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등 많은 민족 영웅들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위에 적은 분들은 이름만 말하면 유치원생들도 아는 분들이지만, 그 이면에 당시에 큰 일을 하셨음에도 우리 국민들이 그 존재와 역할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분 중 한분이 충남 태안의 옥파(沃坡) 이종일(李鍾一) 선생이 아니신가 생각 됩니다.

 옥파 이종일 선생을 한마디로 정의 드리자면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이셨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독립선언문을 살벌한 일경의 눈을 피해 인쇄하신 분입니다.

옥파 이종일 선생 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동상

▲ 옥파 이종일 선생 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동상
 

뼛속까지 항일 의지로 뭉쳐 있던 선생의 기개가 보이는 듯

▲ 뼛속까지 항일 의지로 뭉쳐 있던 선생의 기개가 보이는 듯
 

선생의 생가

▲ 선생의 생가
 

아직도 이 생가에서 독립의지로 불탔던 선생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 아직도 이 생가에서 독립의지로 불탔던 선생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현재 선생의 생가터인 이곳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에는 선생의 뜻과 넋을 기리기 위해 생가와 함께 기념관 및 사당을 지었고, 이곳을 사적지로 성역화 하여 충청남도기념물 제85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인과 과정이 있습니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3.1운동이 펼쳐졌고, 기미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는데 그때는 이 독립선언문이라고 해서 요즘 복사기 스위치 누르면 드르륵 죽죽 인쇄를 하듯 쉽게 되는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의 기념관

▲ 선생의 기념관
 

기념관 입구의 태극기

▲ 기념관 입구의 태극기
 

서울에 남아있는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 유물과 기념지

▲ 서울에 남아있는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 유물과 유적지
 

선생의 연표

▲ 선생의 연표


 특히 일제의 무시무시한 감시망을 뚫고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던 것이지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당시 보성사라는 인쇄 출판사를 운영하고 계시던 옥파 이종일 선생이 책임지고 하신 것입니다.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과정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선생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가 되어 햇빛을 보게된 독립선언문 전문

▲ 선생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가 되어 햇빛을 보게된 독립선언문 전문
 

일경의 눈초리를 피해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는 장면

▲ 일경의 눈초리를 피해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는 장면
 

민족대표 33인의 사진

▲ 민족대표 33인의 사진. 맨 위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종일 선생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은 모습

▲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은 모습


 최남선 선생은 자신이 직접 경영하는 인쇄소인 신문관 직원에게 활자를 짜게 해서 완성한 활자판을 최린의 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성사 사장이셨던 이종일 선생이 공장 감독에게 지시를 내려 가져오게 했고 공장 감독 김홍규는 다시 보성사 인쇄 직원이었던 신영구에게 인쇄를 하도록 해서 독립선언서 2만 1000매가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3월 1일 당일에는 독립신문이 보성사에서 인쇄되어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배포되었는데 이 독립신문 역시 이종일선생이 보성사에서 인쇄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태화관에서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일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기념관의 이종일 선생 흉상

▲ 기념관의 이종일 선생 흉상
 

이종일 선생이 체포되어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은 판결문

▲ 이종일 선생이 체포되어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은 판결문
 

선생께서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

▲ 선생께서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


 이종일 선생께서는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후 출소하시자마자 또 독립운동을 하신, 뼛속까지 항일 의지로 뭉친 분이셨습니다.

 이종일 선생의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에서 출생, 1874년 15세가 되던 해에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서울로 올라와 문과에 급제(정3품에 오름)하였습니다.
 1894년 보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교육사업에 진력했고, 박영효와 함께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898년에는 한국 최초의 한글신문을 창간하고 1908년 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일본의 침략정책을 공격하였습니다.

사당

▲ 사당 '충애사'
 

사당 안에 있는 선생의 영정

▲ 사당 안에 있는 선생의 영정


 이후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5년 8월 31일 68세의 일기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채 이곳 태안 고향의 초가집에서 서거하셨고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께 건국훈장을 추서 했습니다.

기념관과 함께 건립돼 있는 체험관

▲ 기념관과 함께 건립돼 있는 체험관
 

독립선언문의 등사지 인쇄체험

▲ 독립선언문의 등사지 인쇄체험
 

태극기 등사 인쇄 체험

▲ 태극기 등사 인쇄 체험


 선생의 기념관에 가면 체험관이 별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때 보성사에서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던 것을 체험하도록 당시 사용하던 인쇄시설인 등사기 같은 것을 마련해 놓고 인쇄 체험을 할수 있도록 꾸며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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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선언문 내용중에서....


 마지막으로 선생이 인쇄하신 독립선언문중 한 대목을 적어 되새겨 보고 갑니다.

 “민중 각자는 짚단 위에 잠자고 창을 베개로 하며 끓는 물 속이나 불속의 형세라도 흔쾌히 뛰어들어 온 누리가 자주독립 되게 하여 일월이 다시 밝아지면 어찌 한나라에 대한 공로만으로 그치겠는가. 후세에 이 말을 반드시 전하여 훌륭한 조상이 되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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