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사는이야기

충남넷 미디어 > 사람세상 > 사는이야기

김옥균 선생의 유허지를 돌아 보고...

유난히 쓸쓸했던 조선말 개화사상가 사당 답사기

2013.05.30(목) 01:43:31권순도(djshsjshsywy@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흔히 쓰는 말 중에 ‘풍운아’라는 말이 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미처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한 경우 풍운아라고 부른다.

 만약 자신의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똑같이 뛰었는데 그 목적을 달성했다면 그는 풍운아라는 별칭 대신 ‘대박인생’이거나 ‘입신양명’ 혹은 ‘권세가’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근대기에 대표적인 정치 풍운아가 있다면 바로 김옥균 선생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정치적 과정에서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던 부분은 오해의 소지는 있겠으나 약간 오점이었다고 보지만, 그러나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 먹으려 한건 아니었기에 그의 사상이었던 개화와 개혁의 차원에서만 본다면 그는 분명 ‘열린 정치가’였음이 분명하다.

유허지 안내문과 주차장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사당

▲ 유허지 안내문과 주차장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사당


김옥균 선생 유허지 안내문

▲ 김옥균 선생 유허지 안내문

김옥균 선생 사당 정문으로 가는 계단. 사당은 향불 하나 피울 여지조차 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 김옥균 선생 사당으로 가는 계단과 정문. 사당은 향불 하나 피울 여지조차 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김옥균 선생의 묘와 유허지가 우리 충남 아산에 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하다. 쓸데 없는 논쟁과 무의미한 학설 낭비만 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옥균 선생을 논함에 있어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한번 해 본다면, 당시 조선이 하루빨리 개화를 하고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화했다면 우리는 오늘날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선생의 묘지 표지석

▲ 선생의 묘지 표지석
 

선생의 묘지에 대한 안내 비문

▲ 선생의 묘지에 대한 안내 비문


안내문과 표지석 쪽에서 바라본 선생의 묘지.

▲ 안내문과 표지석 쪽에서 바라본 선생의 묘지.


 원래 김옥균 선생의 출생지는 충남 공주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암살당한 그의 시신을 1914년 아산 군수였던 그의 양자 김영진이 이곳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로 옮겨와 부인 유씨와 합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충남 공주시 정안면에도 그가 6세까지 살던 생가지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다만 그곳은 김옥균 생가를 비롯하여 8∼9호의 민가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화재로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닫혀 있는 사당 안으로 들어갈수 없어 왼쪽 상등성이쪽으로 돌아 바라본 사당 내부. 자보가 무성해 인생무상을 느끼게 했다.

▲ 닫혀 있는 사당 안으로 들어갈수 없어 왼쪽 산등성이 쪽으로 돌아 담장에서 바라본 사당 내부. 잡초가 무성해 인생무상을 느끼게 했다.


사당

▲ 사당 뒷쪽 옆에서 반대쪽 정문을 보면서 촬영한 사당 내부. 담장에 핀 작은 들꽃이 애처롭다.


 조선시대 말엽의 정치가, 김옥균의 파란만장한 삶을 한번 되돌아 보자.

 ‘위로부터의 개혁’을 외치며 개화사상을 주장하였던 그는 당시에 원래 정치적 결사로서의 개화당을 만드는데 진력했고 여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개화가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우리보다 앞서 문호를 연 일본을 배우기 위해 동지들을 파견해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게 했고 신사유람단 파견을 주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내정간섭도 심해 김옥균은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는 청나라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개방화된 문물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심지어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국채모집을 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하였고 1884년 12월에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운이 따르지 않았다. 청군이 갑신정변을 붕괴시키기 위해 불법으로 궁궐에 침입해 공격했고 이들의 무력 공격을 막지 못해 갑신정변은 삼일천하가 되고 말았다.

그는 즉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이후 1894년에는 한, 중, 일 삼국의 제휴라는 삼화주의를 주장하며 청나라의 실력자인 리홍장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국내에서 보낸 암살자 홍종우에 의해 암살 당했다.

 그의 시체는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 되었지만 나중에 갑오개혁이 일어난 후 그의 뜻과 개화사상을 인정해 반역죄가 용서되었고 결국 그의 양자에 의해 이곳 아산에 묻히게 된 것이다.

찾는이 많지 않는 선생의 묘소

▲ 찾는이 많지 않는 선생의 묘소
 

묘소 오른쪽에서 보니

▲ 묘소 오른쪽에서 보니 망주석과 동자석이 묘소를지키고 있다.


묘소 왼쪽에서 본 모습

▲ 묘소 왼쪽에서 본 모습


 그의 묘소에서 보니 한때 높은 벼슬까지 했던 개혁자로써 너무나 쓸쓸한 마음이 들게 느껴졌다. 망주석과 석양, 그리고 동자석이 선생의 묘소를 지키는 가운데 한때 세상을 흔들어 보고 조선을 개화하려 했던 의기가 가슴에 와 닿았다.
다시 밑에서 한번 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더 느껴진다. 역사는 역시 승자의 기록?

▲ 다시 밑에서 한번 보니 무수한 잡초 속에 세월의 무상함이 더 느껴진다. 역사는 역시 승자의 기록?

이제 언제 어느 추모객이 또 이 사당을 찾을까. 마지막으로 뒤에서 마을쪽을 향해 본

▲ 이제 언제 어느 추모객이 또 이 사당을 찾을까. 마지막으로 뒤에서 마을쪽을 향해 본 선생의 사당. 뿌연 저녁 안개가 쓸쓸한 마음을 더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후세에 이렇게 고향 공주도 아닌 이곳 아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있지도 않은 사당에 쓸쓸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묘한 연민과 안타까움도 느껴졌다.

 하지만 분명한것 하나, 그는 현실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개화시켜 부국으로 만들려 했던 개혁자였다는 사실. 결과를 떠나 선조들은 늘 나라와 백성을 잘살게 하려고 몸부림쳤다.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