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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의 망언 시리즈 때문에 다시 보는 우리 면천읍성

2013.05.29(수) 15:26:22점생이(uiweyoi3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을 저지르고 5000년 한국사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것은 옆나라 일본입니다. 굳이 뭐라 이것저것 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나라 사람들.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고 가슴 끓게 하는 나라죠.

지금이야 국제정세와 자국의 경제적 목적 때문에 교류하고 왕래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정말 상종하기 힘든 인간들입니다.

 헤아릴수 없는 많은 우리 백성들을 죽게한 수많은 침략전쟁, 그리고 일제 강점기 36년의 세월과 그 끝에 결국 남은 것은 남북분단이라는 최악의 결과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은 악랄한 궤변과 망언 뿐이라니요. 반성과 사과를 모르니 야만인들이죠.

 요즘 그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잇따른 망언을 내뱉는 것을 보면 한마디로 가관이며 그야말로 시리즈와 같습니다. 망언시리즈를 하루가 다르게 내뱉는 저질 언행을 보면서 “너희들은 정말 글러먹은 인종이다”라는 생각 뿐입니다.

  일본을 생각하면 우리가 역사를 기록한 이래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왜구]죠.

허구헌날 바다 건너 들어와 우리의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약탈질하고 사람 죽이던 너무나 짐승같은 야만인들입니다.

 왜구[倭寇]의 한자어 구[寇]자는 도둑, 약탈하다는 뜻입니다. 키가 작은 약탈꾼. 오늘날 저들의 망언과 망동을 보면 우리 민족사에 일본인들은 문명세계를 사는 오늘날 2013년까지도 여전히 왜구에 다르지 않다는걸 느낍니다.

 왜구들은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24시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몰해 야만적인 노략질을 해 댔습니다. 그래서 각 고을마다 지방 수령들은 왜구들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았고 도내 곳곳에는 크고 작은 그런 성들이 무척 많습니다.
 

면천읍성 안내표지판

▲ 면천읍성 안내표지판
 

읍내 먼발치서 본 읍성

▲ 읍내 먼발치서 본 읍성
 

읍성 가까이 왼쪽에서 당진시내쪽으로 본 모습

▲ 읍성 가까이 왼쪽에서 당진시내쪽으로 본 모습


 우리 당진의 면천읍성도 그중 하나입니다.
 면천읍성은 현재의 면천면 관내 고을 전역에 걸쳐 평지에 쌓은 석성입니다.
 

면천이라는 지명의 유래비

▲ 면천이라는 지명의 유래비


 면천(沔川)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보면 “물이 가득 모여 바다로 흘러들어간다”라는 고사에서 따온것이라 하네요. 삼국시대부터 면천으로 불렀다고 하니 명칭의 유래도 유서가 깊습니다.
 

튼실한 성곽

▲ 튼실한 성곽


직조처럼 잘 쌓여진 성곽

▲ 직조처럼 잘 쌓여진 성곽


 예로부터 당진은 태안, 서산과 함께 서해 쪽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요충이었습니다. 이처럼 중국과의 통상에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방상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죠.

 면천읍성은 고려시대 충렬왕때에 세워졌다고 하지만 실제는 백제 초기부터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동서남북 4대문을 다 갖추었던 읍성

▲ 면천군의 동서남북 4대문을 다 갖추었던 읍성


 면천읍성은 동, 서, 남, 북의 사대문까지 갖춘 거대한 성이었구요. 면천에 읍성이 있었던 것은 이곳이 1914년까지 당진에 버금가는 주요 군소재지였기 때문입니다.

 

성곽 위에서...

▲ 성곽 위에서 멀리 당진시내쪽으로


 지금은 이렇게 서편 성벽 일부만 남아 있는데, 성벽에는 7개의 치성 흔적이 남아 있고, 남문에는 성문을 방어하는 옹성이 있으며, 문루가 남문과 서문에 있었다 하네요.

 

읍성 오른쪽 앞에 세워 둔 솟대군

▲ 읍성 오른쪽 앞에 세워 둔 솟대군


 읍성 오른쪽에는 이렇게 솟대를 잔뜩 세워 놓았다. 멀찍이 보이는 면천읍내 길거리는 한적하고 평화롭습니다.
 면천읍성이 있는 면천면 소재지는 작은 마을같은 소박한 곳입니다.

 

면천면사무서 앞에 있는 풍락루

▲ 면천면사무서 앞에 있는 풍락루


읍성을 지나면 곧바로 왼쪽에 면사무소가 있고 그 정면에는 이렇게 풍락루(豊樂樓)라는 누각이 보입니다.

 풍락루는 당시에 면천관아의 문루였는데 건립 연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름은 마을 농사가 항상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풍락루’라 지었다고 하네요.

고을 수령들은 누각 이름 하나조차도 백설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최구현 의병장의 거병지이기도 했던 면천

▲ 최구현 의병장의 거병지이기도 했던 면천


 그리고 이곳은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킨 최구현 의병장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최구현 의병장은 이후 소난지도에서 후사를 도모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순절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원형이 다 사라지고 형태만 복원된 작은 읍성이지만 우리 당진 사람들에게는 자존심과 의기를 불러 일으키는 곳입니다.

특히 요즘 일본인들의 망언과 망동을 보면서 그냥 지나칠수 없어서 면천읍성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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