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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역사이야기 해미읍성

얄궂은 운명이 공존하는 역사의 현장

2013.05.28(화) 09:52:49혜류(tlstkdcjs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쉬운 역사이야기 해미읍성 사진

 


여기 2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세번째 왕인 태종은 어느날 보고를 받는다.
"해안지대 왜구의 노략질이 심각하여 요즘 문제가 많사옵나이다. 
특히나 충청 지역쪽의 침략이 많으니 굽어 살피소서.
태종이 즉위한지도 이제 10여년..
그간 많은 정책들을 펼쳤으나, 주변 오랑캐들의 침략은 특히나 귀찮은 문제가 아닐수없다.
"여봐라. 덕산에 있는 충청병마절도사영을 해미현으로 옮기고 거대한 읍성을 짓도록 하여라!"
그리고 충청병마절도사영은 현재의 해미현으로 자리를 옮기게된다.
이때가 1417년 태종 즉위 17년때의 일이다.
  
하지만 왜구와 오랑캐의 침략을 굳건히 버티면서 서해의 역사를 지켜왔던 이곳은 얼마 후 수많은 이들의 원망섞인 피눈물의 바다가 공존하는 곳으로 변모한다. 
 
 
그로부터 470여년 후
조선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왕인 고종때 병인박해가 발생한다.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노란머리의 서양인들이 눈에 거슬리기만 하다. 안그래도 맘에 들지 않았던 대원군은 때를 노리다 정부대관들의 비난에 힘입어 천주교 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관아에는 1000여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잡혀와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는데 이 처절한 사건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바로 해미읍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으로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형태가 잘 보존된 사적지중 하나이다
이 성은 태종 17년(1417년)부터 1421년(세종3년)까지 축성되어,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이다.
병마절도사라 함은 지금의 군체제에 비한다면 군사령관의 위치정도 되니 그 국가적 중요성과 권한이 이루말할 수 없다.
이후 230여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고 이후 청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특히나 이곳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충무공 이순신이 군관으로 10개월 근무한 적도 있다.

해미읍성 전남문

▲ 해미읍성 전남문


 
해미읍성의 정문인 '전남문'을 들어서면 광활한 평지와 함께 최근 복원된 조선시대의 가옥모형들이 관광객들을 반긴다.현재로써는 과거의 아픔을 간직한채 잘꾸며진 공원으로의 느낌이 강하다.  
해미읍성의 대략적인 개괄도를 보면 꽤나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 과거의 군사기지임을 의심치 않게 한다.

호서좌영

▲ 호서좌영


전남문을 들어가 곧은길을 걸어가다보면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는 목조건물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충청도에 있던 5개의 병영중에 하나이다.
수목이 우거진 초목이 태극문과 잘 어울리는 한쌍같다.

동헌

▲ 동헌


안쪽을 들어가면 동헌(東軒)이라고 써진 현판의 건물이 맨처음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원래 호서좌영에는 동헌, 책실, 동헌부속사의 3개의 건물이 있다.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인근 12개군의 병무행정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니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그 업무범위는 가히 넓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동헌부속사

▲ 동헌부속사


동헌의 왼쪽에는 동헌부속사가 ㄱ(기역)자의 형태로 위치하고 있다. 동헌 부속사는 관아의 물품을 보관하고 출납을 맡아보는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책사

▲ 책사


동헌 부속사의 옆에는 호서좌영의 마지막 건물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책실'로써 병마 절도사 또는 현감경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그들 자제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한 곳이다. 그래서 일명 책방 또는 책사라고도 불리어진다.

이렇게 서해안을 끊임없이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지켰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뒤로한채 호서좌영을 나오면 벽면에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터가 자리잡고 있다.

쉬운 역사이야기 해미읍성 사진

 

천여명의 천주교 신도들은 이곳에서 고문받고 스스로의 의지를 꺽어야 했으며 죽임을 당해야했다. 이는 스스로의 개인적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받는 순간이었으며, 역사적으로 슬픔이 묻어 있는 사실로서의 역사이다.

천주교 순교비

▲ 천주교 순교비




문화의 흐름이란 지속적이고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는 것이 맞다. 
이를 거스르려 함은 역사적으로 이와같은 불편한 평가를 받게 된다.
백성들의 요구는 수렴하되 나라를 평온하게 다스리는 것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이 고심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해미읍성 전경

▲ 해미읍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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