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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조세로 내었던 곡식을 한곳에 모았다는데~

아산 공세곶고지, 공세리성당, 이명래 고약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193-1

2024.01.31(수) 15:41:52 | 안개비 (이메일주소:hae041@naver.com
               	hae04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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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 공세곶고지


공세곶고지
는 조선시대 조세로 내었던 곡식을 저장하였던 조창인 공진창(공세곶창)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용어가 참 생소하죠?
그래서 간단히 용어를 정리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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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곶고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21호)


▶ 공세곶고지(貢稅串庫地) : 조선 시대에 사람이나 전답 등 재산에 부과하는 각종 세금을 곡식으로 내었고, 이 곡식을 쌓아두던 창고 터이며, 바다로 툭 튀어나온 지형에 위치하여 공세곶고지라 함.

▶ 공진창(貢津倉) : 조선 시대에 충남 아산 인주면 공세리 나루터 인근에 세운 창고로 40개 지역에서 거둔 조세미를 보관함.

▶ 공세곶창(貢稅串倉) : 공진창을 처음에는 공세곶창이라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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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곶창


결국 세 가지 명칭이 모두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조선 시대에 충청도 지역 세금을 곡식으로 거두어 한 장소에 모아 경성으로 옮기기 전 보관하는 창고를 부르는 명칭이니, 어떻게 불러도 같은 의미로 알아두면 좋을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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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리성당


그럼, 명칭이 비슷한 공세곶고지와 아산시의 명소로 알려진 공세리성당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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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곶창


공세리성지성당이 위치한 공세곶창은 조선시대에 충남지역의 바닷길을 통한 조운을 담당한 대표적인 조창으로,  삼면(동, 서, 북)이 바다로 돌출된 곶을 형성하기에 더욱 운송에 중요한 위치였으며 그 지형을 따라 공세곶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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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도 해운판관비


이처럼 17세기 초 공진창 둘레에 창성(倉城)을 쌓았다고 하며, 관에서도 공진창을 관리할 판관을 파견하였다 하니 그 중요도가 더욱 느껴집니다.
공진창 정비 시 주변에 흩어져 있던 해운판관들의 공덕비를 성벽 아래에 모아 놓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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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 흔적


과거의 위용은 사라지고, 지금은 동네의 담장으로 그 용도가 바뀐 성벽의 흔적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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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곶고지와 성벽


그래도 지금은 사진의 좌측 창고부터 우측 공세리성당까지를 잇는 성벽이 복원되었고 그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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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곶고지 흔적


이제 공세곶고지와 공세리성당의 관계를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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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곶고지 흔적


공세리성당은 조선시대 공세곶고지가 있던 자리에 위치하는데, 1895년 드비즈(프랑스) 신부가 창고로 쓰이던 건물을 사들여 1897년 성당과 사제관으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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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리성지성당


이후 새 성당 건축을 계획하여 1922년에 완공하였고 지금에 이른답니다.
그렇게 공세곶고지의 명칭이 따라와 결국 성당도 공세리성당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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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을 따라서


공세곶창의 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내포 지역, 공세곶창 및 공세리성당과 32인의 순교자를 모신 성지로 된 역사를 자세히 안내하고 있더군요.
너무 방대한 양이어서 헤드라인 정도만 보고 지나쳤음이 못내 아쉬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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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곶고지


공세리성당에서 바라본 공세곶고지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 보이지만,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과 공세리성당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역사의 현장이라 생각합니다. 


▶ 이명래 고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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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래 고약


어린 시절 고약(膏藥)이라 해서 종기가 생겼을 때 까맣게 상처에 붙여 고름을 짜내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현대의 '전통의약 1호''이명래 고약'이라 하는데, 공세리성당과 이명래(요한)의 이야기를 올립니다.

<한국농정신문, 이상락님 그 시절 우리는 中> 
이명래(요한)은 1890년 서울 태생이며 독실한 천주교 집안으로,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자 한 외국인 신부의 도움을 받아 아산의 어느 성당 부근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 성당에서 성(成) 씨를 사용하는 신부님을 만났는데, 

"이봐, 요한! 물 끓었는지 솥뚜껑 좀 열어 보아라!"
"어이구, 기름이 펄펄 끓고 있습니다요."
"그럼, 이번에는 한문책에 나와 있는 처방 중에서 두 번째 약재를 솥에 넣어라. 자, 내가 시계를 줄 테니까 그 약재를 넣고 한 시간 동안 불을 더 땐 다음에 식혀야 돼."
"예, 신부님. 이번에 한 번 더 끓여서 식히면 고약이 되는 것인가요?"
"아니야. 식혀서 걸러낸 다음에 다른 약재를 또 넣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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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세리성당


성당 뜨락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기름을 끓이고 약재를 넣고... 하느라 여념이 없는 이 사람들이 바로 공세리성당을 건축한 성 신부(다비드)와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이명래 소년이었답니다. 
그 후 이명래는 의젓한 청년으로 성장했고, 고약을 개발한 성 신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서와 치료법을 이명래에게 물려주었으며, 그 비방대로 고약을 제조하였는데 이것이 '이명래 고약'의 시초라고 합니다.


아산 공세곶고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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