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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뉴스

‘세계 최초’ 상징성 달고 ‘판목?안면운하’ 조형물 일반에 공개

남면 신온교차로 내에 ‘우뚝’… 운하명칭 새긴 기단 위에 운하공사 형상화한 조형물도 제작해 설치

2023.12.14(목) 13:32:12 | 주간태안신문 (이메일주소:east334@hanmail.net
               	east334@hanmail.net)

조형물까지 총 높이 5.1미터, 가로 5.3미터 규모… 역사적인 기록에서는 수에즈 운하보다 230년 앞서 

판목운하 조형물 제막식.

▲ 판목운하 조형물 제막식.


“그 당시 조선 인조 임금이 무슨 지시를 했기에 김육이라는 충청감사가 이곳에 와서 진두지휘하면서 운하를 팠을까. 간절한 마음, 나라를 살려야겠다는 그 마음 없이 이 대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여기를 지날 때마다 그냥 놔서는 안되겠다 그래서 무모하게 시작하게 됐다.”

‘세계 최초’라는 상징성을 입고 ‘판목???안면운하’ 조형물이 안면도로 진입하는 태안군 남면 신온교차로 내에 우뚝 섰다.

하얀 천을 걷어낸 조형물을 마주한 가세로 군수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며 운하를 완성한 선조들의 열정과 희생에 경의를 보냈다. 

태안군은 지난 6일 안면도 진입 초입인 남면 신온교차로(신온리 산28-6번지)에서 ‘판목??안면운하 조형물’ 제막식을 갖고 세계 3대 운하 중 가장 오래된 인공 해상운하인 수에즈운하(Suez Canal)보다 23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운하’라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참고로 수에즈 운하(Suez Canal)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해상 운하 중 하나로, 프랑스와 영국의 공동작업으로 1869년에 완성됐다. 10년이 걸린 운하는 이집트 북부의 포트 세이드에서 시작해 이집트 남부의 수에즈로 이어진다. 수에즈운하의 길이는 163km이며, 너비는 평균 205m, 최대 깊이는 24m다.

코린토스 운하(Corinth Canal)는 6.4km 길이로,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코란토스 지협을 연결하는 수로다. 지중해와 에게안해를 연결한다. 로마 네로 황제 시기 건설을 시작해 26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1893년에 완공됐다. 파나마 운하(Panama Canal)는 파나마 지협을 가로지르는 약 82km 규모로 1914년에 개통됐다.

가래와 삽으로 폭 300m, 수심 3m 파내 바닷물 유통… 높이 5.1m, 가로폭 5.3m의 ‘판목??안면운하’ 조형물

판목안면운하 조형물.

▲ 판목안면운하 조형물.


이날 조형물 제막식에서는 가 군수를 비롯해 박경찬 부군수와 조한각 행정안전국장 등 관계자들과 신경철 의장, 최근웅 태안군정발전위원장과 기관사회단체장, 이용복 안면발전협의회장을 비롯한 지역주민 등이 참석해 조형물 제막식을 지켜본 뒤 추억의 사진을 남겼다.

‘판목???안면운하’ 조형물은 높이 5.1m, 가로폭은 5.3m 크기로, 상돌 위에는 운하 조성 당시 가래로 운하를 파고 있는 백성들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올려 판목??안면운하 건립 당시에 백성들의 땀과 열정의 결정체라는 상징성도 부여했다.

이날 제막된 조형물에는 ‘판목??안면운하’의 유래가 머릿돌에 새겨졌다. 그 유래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판목·안면운하는 1638년(조선 인조 16년)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세곡선의 안전 항해를 위해 당시 안면도 창기리와 남면 신온리의 접경지역을 잘라 가래와 삽으로 폭 300m, 수심 3m 파내 바닷물을 유통시킨 운하이며 이로써 안면곳이 안면도(섬)가 되었다. 특히, 천수만과 서해바다를 가로지르는 안전한 해상통로로 수에즈운하(1869년)보다 23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운하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유래 하단에는 가 군수를 비롯해 조형물 건립에 힘 쓴 공직자들과 조형물을 제작한 김성복 교수 등의 이름이 새겨졌다. 아쉬운 점은 제막 날짜가 채워져 있지 않은 점이다.

이날 제막식에서 가 군수는 ‘판목??안면운하’의 의의에 대해 “험한 그 당시 역경을 이겨내면서 땅을 파고 물을 흐르게 만들어 그야말로 태안의 지도를 바꾼 선조들의 열정과 땀과 희생에 미치겠느냐. 지금도 한없는 감사와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면서 선조들의 유훈이 남아있다며 “‘판목??안면운하’를 하루에도 몇 십명씩 이 자리를 지나면서 태안이 이런 곳이구나라고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 가슴이 뛰고 벌렁거려서 어떻게 가만히 있겠나”라고 벅찬 심정을 전했다.

군 관계자는 “‘규모면에서는 수에즈운하 등에 못미치지만 ’판목??안면운하’가 완성됨으로써 안면도라는 인공섬을 만들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조형물 제막식 행사에 참석했던 이용복 안면발전협의회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판목안면운하의 역사성을 부여한 뒤 “한양으로 가는 세곡선의 안전 항해를 위해 1638년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를 자르니 안면곶이 안면도가 되었다”며 “늦은 감이 있지만 안면도의 의미 있는 역사를 태안군이 소환했다. 축하해달라”고 소감을 전했다. 

사료 속에 나타난 ‘판목??안면운하’… 운하 굴착 이후 ‘안면곶→안면도’로

한편, ‘판목??안면운하’에 대해서는 그동안 안면도의 면면을 다룬 사료 속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안면도에 깃든 역사와 자연, 사람이야기를 다룬 ‘안면도에 역사를 묻다’(2020.6.1., 김월배??문영숙 지음)에서는 ‘판목안면운하’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원래 섬이 아니었던 안면도는 17세기에 조운선의 난파를 방지하고 뱃길을 단축할 목적으로 운하를 굴착하면서 육지와 떨어진 섬이 되어 섬 도島 자가 붙어 안면도安眠島가 되었다.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1623~1649) 때 안면의 2/5지점이자 가장 좁은 목인 굴항포 또는 목판개라는 곳을 잘라 안면도를 섬으로 만들었다. 지금의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 신온리 드르니항 사이에 운하를 팠는데, 바로 안면도 사람들이 판목이라고 부르는 운하다. 인조 때 태안의 아전 방경잠房景岑이 충청감영에 진정했고, 충청감사 김육(1580~1658)이 운하 공사를 제안했다. 그리하여 인조 16년(1638)에 당시 영의정 김유가 안면 창기리 판목과 서북단 남면 신온리 드르니항 남단의 굴항포를 절단하는 운하공사를 명했다. 굴항포를 안면도 사람들은 ‘판목’, ‘개목’, ‘개미목’이라고 부른다. 이 덕분에 조운로가 무려 200여 리나 단축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부터 조운선들은 길게 뻗은 천수만 동쪽을 따라서 이 운하를 통해 백사장포구로 나가면 직접 서해로 통할 수 있었고 뱃길이 가장 험난하기로 악명 높은 ‘쌀썩은여’를 피해 갈 수 있었다. 충청감사를 지낸 김육은 당파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을 시행하고 동전을 유통시킨 제도개혁의 선구자였다. 이 운하를 건설하자는 김육의 제안 덕분에 수많은 조운선들이 쌀썩은여를 거치지 않고 난파를 면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2013년 12월 ‘천혜의땅안면도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천혜의땅 안면도 전설 및 지명 유래’에는 판목안면운하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들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나타난 안면곶의 착항과 주변의 상황들을 보면 이렇다. 

「안면도 창기리 북서단에 있는 선바위 지선에서 북동으로 해안선 따라 150m 끝머리와 남면 신온리의 최남단 돌출부(현재 구 연륙교 부대 분초막) 구간이 착항 서西한계선 지점이며 이곳을 연륙교 다리 위에서 서쪽 방향으로 내려다보면 직선거리 약 40m의 수면상으로 최간조시에는 양안에 걸쳐 울퉁불퉁 솟은 암반[잠은 여(潛隱礖)]들이 즐비하게 드러난다. 또 동쪽의 약 150m 전방지점에 또한 양안에 약간의 암반[잠은 여(潛隱礖)]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동東의 한계선인 연륙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 동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서西한계선 언저리의 잠은 여를 목탄개 또는 목딴개, 목딸갱이라고 부른다. 양안에 걸쳐서 다니던 옛 길이 있었음을 들어 알았으나 그동안은 그저 무관심하여 왔다고 한다. 굴항포에 연륙되었던 산맥 폭은 약 200m이며 착항된 양안의 거리도 약 200m가 된다. 양안의 중심맥이 뻗어 내린 서西한계선 아래의 잠은 여를 목판개라고 하는데, 그 지명이 문헌에 나타난 굴항포掘項浦 목을 파낸 개포이고 보니까(목판개 또는 목탄개가 되는 것이니까)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남면 착항지선 멀리 현 검문소 북방의 산기슭에는 350년 전의 옛길이 지금까지(노폭 1m가 좀 넘는) 남아서 조상님들의 희미한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으며, 여로에 지쳤던 선인들의 한숨 소리가 귀에 들려옴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안면도 방면의 옛 길은 연륙교 공사 당시 중장비로 파내어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으며 오직 하나 착항 작업 중 휴식과 점심을 먹던 자리라는 신털이봉만이 근래에 심은 오리나무 그늘 밑에 쓸쓸히 잔영을 드러내고 있다. 이로써 안면도 착항에 관련된 기록과 증언을 정리하면, “안면곶 착항은 인조 16년(1638)에 당시 영의정 김류와 충청감사 김육이 안면곶 창기리 서북단과 남면 신온리 남단의 굴항포를 절단하여 섬이 되게 하였다.”라고 종합할 수 있다. 안면곶을 착항하게 된 목적과 안흥량安興梁의 유래 그리고 안면곶을 착항하게 된 동기와 목적은 『서산군지』권1 착항조의 주석과 같이, 영호남 지방의 세곡선과 호서연안의 세곡선, 그리고 천수만 해안 일대의 일반 선박 및 어선 등의 운항에 안전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실은 고려조 중엽부터 시도했던 태안과 서산간의 좁은 목인 굴포를 착통코자 수 차례에 걸쳐서 착공해 오다 실패하고 마침내 안면곶을 착항하게 한 것이니, 안흥량 항로가 얼마나 난처했던가를 가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안면도 착항 후에도 잇따라 안흥량 파선 사고가 발생하여 서산, 태안간의 굴포 굴착론이 다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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