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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김옥균 유허

2023.11.09(목) 12:49:48 | 춘당 (이메일주소:yosaebi45@daum.net
               	yosaebi45@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오백년의 유구한 역사를 면면히 이어오던 조선의 국운이 지는 해처럼 서서히 기울어 가던 1884년(고종 21년) 청나라의 간섭이 강화되고 외척인 민씨 일파의 횡포가 나라를 도탄에 빠트리자 청의 조공 폐지와 민씨 일파의 축출 등 14개조의 혁신강령을 들고 개화파의 김옥균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정변을 일으켰으나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 군대의 배신으로 혁명은 겨우 3일을 버티다 청나라 군사에게 와해되며 개화파의 정권'은 불과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정변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옥균은 그 후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고 서광범, 박영효 등의 동지들은 외국으로 피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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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은 그 후 한 중 일 삼국의 제휴라는 삼화주의를 주장하며 중국의 실권자인 이홍장과 면담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갔으나 민씨 일파의 척신들이 보낸 자객(홍종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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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수구파 세력에 의해 빼돌려진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보내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을 당하고 전국의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시신(머리)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아오야마(靑山) 외인(外人) 무덤에 묻혔고 1914년 아산군수였던 양자 김영진이 옷과 머리카락을 수습하여 아산 고을이 내려다 보이는 야트막한 야산에 부인 유씨와 합장하여 그의 넋을 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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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는 그의 옷과 머리카락만이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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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의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均) .고우(古愚) 별호는 두타거사(頭陀居士)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1851년 1월 23일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안동 김씨인 아버지 김병태(金炳台)와 어머니 은진 송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문장, 시, 글씨, 그림, 음악 등 학문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으며 6세 때 재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11세 되는 해에 양부 김병기가 강릉 부사에 임명되자 강릉으로 따라가서 16세까지 율곡의 사당이 있는 송담서원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그후 한양으로 돌아와 22세인 1872년(고종10년)에  문과 알성시(謁聖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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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2월 조선이 일본과의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開化派) 청년들은
나라의 자주 독립과 실력 양성, 개혁을 추진 또는 건의 할 단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신분에 구애되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하며 1876년 2월 김옥균은 조선시대 내내 존재하고 있던 신분제도의 틀을 뛰어 넘고 개혁과 개화에 뜻을 둔 청년들을 모아 충의계(忠義契)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홍영식, 서광범, 박영교, 박영효, 서재필 등이 회원이었고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윤웅렬 등이 이들 단체를 외곽에서 지원, 자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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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면 부패 척결과 낡은 인습을 타파하고 신분 차별을 완화 할 것이며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여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여 나라를 근대화 하는 것이 청나라나 외세로 부터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김옥균은 1881년 5월에 자신이 직접 선진화 된 일본을 시찰하기 위하여 일가들의 재산을 모으고 주변의 후원을 얻어 일본의 산업시설을 돌아 봤는데 일부 제품들을 구입하여 조립과 분해를 하고 원리 등을 터득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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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의 주요 인사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사이 청나라를 등에 업은 척사파와 성리학자 집단, 민씨 척족 세력 등이 권력을 독점하고 개화파를 외직으로 좌천시켰다. 박영효는 광주 유수로, 김옥균은 포경사(捕鯨使)겸 동남제도 개척사로 좌천되었다. 그럼에도 김옥균은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제국 학교에 유학생 입학을 주선하는가 하면 진보적 계몽적 내용을 담은 기화근사(箕和近事)를 지어 고종에게 바치는 한편
도로 정비에 관한 모든 문제를 정리한 치도약론(治道略論)을 한성순보에 발표하였다.

그는 조선의 자주권 확보를 위해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고종을 설득하여 서재필과 그의 동생 서재창, 유혁로(아산 출신)을 비롯한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식 군사 기술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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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일으킨 개혁의 정변은 단 사흘만에 끝났지만 그의 이상과 신념은 현재의 시각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눈만 뜨면이 아니라 자고 있으면서도 나라를 책임진 같은 국정 파트너끼리 원수처럼 싸우는 이 나라의 정치 현실은 당시 조선의 어지럽던 정치판을 답습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늘도 시신없는 그의 넋은 아산 고을을 떠돌며 울분에 차 있을지도 모른다 


김옥균선생유허지
충남 아산시 영인면 고균길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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