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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농지화 작가 '이만우'의 터전, '상왕동'을 함께 걸으며 아련한 추억 속으로

2023.09.30(토) 23:57:19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익어가는 나락들이 가을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 노란 들녘을 보고 있으면, 공주에서 나고 자라 살아온 터전을 화폭에 담는 이만우 화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림에 관심 있는 이들은 화가 이만우라고 하면 농지화(農地畵) 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며, 그를 잘 모르는 이들도 공주하숙마을 사무동 위 교복입은 학생들을 그린 화가라고 언급하면 "아하!"하고 무릎을 칠 것이다.

9월 27일(금), 추석 연휴를 앞두고 그림 전시장이 아닌 공주시 상왕동에서 화가 이만우를 만났다. 

공주시 상왕동(옥룡동 행정관할)의 가을 들판 풍경

▲ 공주시 상왕동(옥룡동 행정관할)의 가을 들판 풍경


화가 이만우가 나고 자란 공주시 상왕동은 공주시 중앙부에 있는 법정동이다. 중등골, 아랫왕촌, 왕촌, 가나무쟁이, 작은목골, 큰목골 등의 마을이 있다.

농지화 시리즈를

▲ 농지화 시리즈를 그리는 화가 이만우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서울과 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는 2009년부터 공주시 상왕동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전업작가의 삶을 살고 있다. 마을 기록화 사업에 뜻을 함께한 이들과 상왕동 탐방을 기획하며, 상왕동을 안내해 줄 분을 찾다가 황금빛 들녘을 보는 순간 문득 그를 떠올리게 됐다. 

지금은 사라진 공산성 내의 작은 마을, '성안마을'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그림 작업을 이어온 화가인지라 상왕동에 대한 기억도 남다를 것으로 짐작했다. 내심 잊혀 가는 것들을 귀히 여기는 그의 성정을 신뢰했기에 무리한 부탁인 줄 알면서 연락을 취하게 되었고, 우리 일행의 활동 취지를 이해해준 그는 바쁜 시간을 흔쾌히 내어 주었다.

용문서원(龍門書院)

▲ 용문서원(龍門書院)은 후진양성을 위해 일생의 마지막 무렵을 상왕동에서 보낸 조선 중기 경제사상가인 초려 이유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질경이 씨름

▲ 질경이 싸움


화가 이만우가 우리 일행을 처음 안내한 곳은 용문서원이었다. 용문서원은 초려 이유태를 기리기 위해 지역유림과 후손이 1986년에 세운 서원이다. 초려 선생은 사계 김장생의 고제삼현(학식과 품행이 우수한 3인의 제자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를 가리킴)으로 충청오현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그러나 용문서원은 이런 곳이네, 초려 선생은 이런 분이네, 등등의 설명이 아니라 대뜸 질경이 싸움을 제안했다. 질경이 싸움은 질경이 줄기를 잡고 상대방의 것을 잘라내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저 어릴 때는 이런 거 하면서 놀았던 곳이예요." 그가 설명한 용문서원이다. 

토강이 있던 곳

▲ 토강이 있던 곳


용문서원을 나와서는 눈앞에 펼쳐진 논 한쪽을 가리키며, "저기에는 '토강'이 있었어요. 물을 가둬둔 웅덩인데, 미꾸라지도 잡고 썰매도 타고 하던 곳이지요, 옆의 논두렁을 따라가면 숭의사(崇義祠)가 나오는데, 우리는 주로 그 길로 다녔어요." 한다.

숭의사 1

▲ 숭의사 안내판
 

숭의사

▲ 숭의사


그가 안내한 숭의사는 성암 이철영 선생의 학덕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8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성암 선생은 초려 이유태 선생의 9대 손으로 고종 4년(1867) 공주시 상왕동 중호마을에서 태어나 공주, 부여에서 후진을 양성하던 중 1909년 민적법이 공포되자 일본에 맞서 투쟁하다 체포되어 10여 년간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는 등 항쟁하다 1919년 53세로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이만우 작가는 숭의사와 이철영 선생에 대한 설명에 앞서 언제 심겨졌는지 몰랐다면 사당 뒤편의 조경수에 관심을 보였다.

숯공장이 있던 자리

▲ 숯공장이 있던 자리 


숭의사를 내려온 이만우 작가와 우리 일행은 목장이 있었다는 가나무쟁이 마을쪽으로 이동했다.가나무쟁이는 가나무정이, 가정목, 가정,가목으로 불리며 가나무가 있어서 또는 가목정(柯木亭)이 있었다하여 가나무정이라 명명한다고 한다.

이곳은 변화무쌍했던 곳이었다. 목장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며, 1990년대까지 숯공장이며 가마니공장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공장 운영이 어려워졌고, 문을 닫은 공장들이 생겨나면서 지금은 빈 건물만 남아 있다고 한다.

태양광 시설이 들어선 자리

▲ 태양광 시설이 들어선 자리
 

가나무쟁이에서

▲ 가나무쟁이에서


대신 태양광 시설이 들어서기도 하고, 농막 형태를 띤 불법 건축물들이 들어서기도 한단다. 화가 이만우가 소년시절이던 1970년대 상황 3통에는 총 21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16가구가 경주 이 씨 집안사람들이었고, 나머지 5가구망 다른 성씨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건물의 용도가 점점 바뀌는 것처럼 마을 구성원도 예전과는 사뭇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농지화작가이만우의터전상왕동을함께걸으며아련한추억속으로 1

 

▲ 안산이 있는 마을
 

외양간

▲ 외양간의 소
 

닭장 속 백자보

▲ 닭장 속 백자보


그나마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그 맞은편으로 가 보니, 소 울음 닭 울음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이만우 작가 역시도 두 곳에 닭장을 짓고 여러 마리의 닭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닭 모이를 주고 닭장을 살피는 시간이 가장 힐링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살구쟁이

▲ 살구쟁이
 

살구쟁이

▲ 살구쟁이 가는 길
 

살구쟁이

▲ 살구쟁이


우리는 그 정겹고 가슴 따뜻하게 하는 곳을 지나서 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가 최소 400명에서 최대 700명으로 추정되는 '공주형무소 재소자 및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지'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흔히들 '살구쟁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실제 지명은 '살 구덩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만우 작가는 어린시절 어른들 심부름으로 물주전자를 들고 지금은 국도가 된 논과 밭으로 가려면 지름길인 이곳을 지나다녔다고 한다. 동무들과 토끼몰이를 하던 곳이기도 한데, 집단 학살이 있던 곳인 줄 알았으면 무서워서 다닐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뒤를 따라서 살구쟁이로 들어서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애통함이 느껴졌다.

마을ㅇ옛집

▲ 마을에 남아 있는 오래된 옛집
 

큰길로 나가는 골목길

▲ 큰길로 나가는 골목길


상왕동에서 대처로 나갈 수 있는 길은 4곳이나 있다고 한다. 첩첩산골이라 할 수 없는 마을이다. 그런데도 1970년대에 15원 하던 버스비가 없어 시내 학교까지 걸어다니고, 먹을 것이 없어 동네 부잣집 배 과수원에서 서리도 많이 했고, 극약을 놓고 약 먹은 꿩을 잡는 즉시 내장을 제거해서 잡아먹곤 했다고 한다. 

몇 채 남아 있지 않은 옛 모습을 간직한 낡은 집들을 지나오며 50년 사이에 상왕동에 많은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토강'이라는 예쁜 우리말이 있는 고장, 역사책에서 배우지 않은 슬픈 역사를 간직한 마을, 그곳이 상왕동이었다.

화가 이만우가 아니었다면 용문서원과 숭의사가 있는 고장으로만 기억됐을 상왕동을 다녀오고 나니, 우리나라 우리 땅에 더욱 애정이 생긴다.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게 해준 화가 이만우에게 감사하며, 곧 있을 초대전에서 좋은 그림으로 다시 만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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