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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야리에 잠든 민속학자 ‘송석하’… 민속원서 ‘송석하의 부와 학문’ 다룬 신간 출간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문화민족주의자의 민낯을 보다> 발간… 민속학계 태두로 추앙

2023.06.22(목) 15:25:06 | 주간태안신문 (이메일주소:east334@hanmail.net
               	east334@hanmail.net)

공동저자인 오석민 지역문화연구소장, ‘문화민족주의자’로 공인하려는 입장에 의문 표시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문화민족주의자의 민낯을 보다 앞 표지.

▲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문화민족주의자의 민낯을 보다> 앞 표지.


최근 민속학계의 태두로 추앙받고 있는 ‘송석하’와 관련된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문화민족주의자의 민낯을 보다>라는 신간이 민속원에서 출간됐다. 

송석하는 울산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태안에 묻혀 있다. 정확히는 근흥면 두야리에 잠들어 있다. 

1996년 정부에서는 송석하의 민속예술에 대한 관심을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평가해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고 이듬해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2004년에는 그의 전집이 출간됐고, 2022년에는 ‘조선민속학회’ 90주년을 기려 근흥면 두야리에 있는 묘역에 공적비를 건립했다. 이러한 선양사업을 주도했던 기관은 국립민속박물관이었다. 1946년 송석하가 초대 관장으로 재직했던 ‘국립민족박물관’을 자신의 뿌리라고 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석하의 가계와 행적을 살펴보면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게 중론이다. 빈농 출신의 송석하 아버지 송태관은 일본 유학을 배경으로 2년 만에 참판에 해당하는 고위직으로 승진했고,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사업가로 변신했다가 실패했으나, 사이토 총독과 6번 이상 만나면서 경제적으로 재기한다. 

송태관이 태안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때의 일이다. 1924년 근흥면과 남면 사이의 해변에 100만평에 가까운 면적을 메운 것이다. 지금까지 ‘서풍농장’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1928년에는 지금의 만리포해수욕장 상가 일원의 토지를 불하받는다. 그리고 1940년 해수욕장 개장을 허가받았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개장하지는 못했다. 만리포해수욕장이 개장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7년의 일이었다. 

근흥면 두야리에 잠들어 있는 민속학자 석남 송석하 공적비

▲ 근흥면 두야리에 잠들어 있는 민속학자 석남 송석하 공적비


송태관의 장남으로 태어난 송석하는 1930년대 이후 총독부의 시책에 호응하는 글을 다수 발표했다. 특히, 1943년에는 백두산 천지에 배를 띄우고 태평양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에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했다. 

송태관과 송석하 부자는 시종일관 정치권력에 밀착한 행보를 보였다. 대한제국-일제강점기-미군정기로 이어지는 시기에 정치권력과 멀어진 적이 없다. 

태안 지역의 간척사와 소금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한 바 있는 저자 오석민 지역문화연구소장은 이러한 인물을 ‘문화민족주의자’로 공인하려는 입장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아울러 해당 인물의 가계와 행적에 대한 검토도 하지 않는 풍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더불어 오 소장은 “민속학자의 친일에 대한 의미로 한정하지 말고 조선 말엽 신분제의 동요와 새로운 지배 계층의 출현과정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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