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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교동 대동계, ‘박문수 깃발’ 충남역사박물관 기증

2022.10.05(수) 14:43:08 | 금강뉴스 (이메일주소:s-yh50@hanmail.net
               	s-yh50@hanmail.net)

공주시 교동 대동계가 10월 4일 충남역사박물관에 ‘박문수 깃발’과 1930년대 산신제 계문서 등을 기증했다.

공주 교동 대동계 ‘박문수 깃발’ 기증장면

▲ 공주 교동 대동계 ‘박문수 깃발’ 기증장면


일명 ‘박문수 깃발(너비 2m, 길이 4m)’은 박문수가 공주 교동에 거주했을 때 마을에 내려준 농기(農旗)이다. 농기는 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것으로 용기(龍旗), 용대기(龍大旗)라고도 불린다. 

기면에는 거대한 청룡이 솟구치듯 꿈틀대는 형상으로 발톱과 몸통의 비늘 조각이 희미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폭 우측 변에는 다른 천을 덧대어 촘촘하게 바느질하고,‘康熙三年癸卯四月十五日?設 至大正四年乙卯四月八日改建 公州面錦町農旗’라고 명문을 써두었다. 

이는 강희 3년 곧 1664년(현종 5)에 4월 15일 처음 만들었으며, 이후 몇 차례의 개수를 거쳐 최종적으로 대정 4년(1915) 4월 8일 다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박문수 깃발’이라고 구전된 것은 박문수가 공주 교동에 거주하던 시기와 농기를 개수하던 시기가 맞물려 농기를 새롭게 만들 때 박문수가 관여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박문수가) 백성들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잘 알아 해학을 섞어 이야기하곤 해 백성들이 좋아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그의 대동계 농기 기증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현재 이 깃발은 매우 낡고 기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원형 훼손이 심해 상태로 전문적인 복원과 보존이 필요하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1691∼1756)는 30대 중반에 3년 남짓 공주 교동에 살았고, 이후 관직 생활 때도 공주 집에 자주 내려왔다. 그는 공주에 살던 시절 백성들의 어려움을 가까이서 겪었고, 이때의 경험은‘위민(爲民)관료’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특히 박문수는 공주 거주 중인 1727년 9월 영남별견어사에 임명됐다. 그는 어사 임지로 떠나기 전, 영조와 대화하면서 공주에서 보고 겪은 농민의 생활상을 상세히 전하기도 했다. 

공주 교동집은 박문수 6세손이 1894년 서울 회현동으로 이주할 때까지 유지됐다. 한편 다른 고령 박씨들도 웅진동 ‘박산소’를 비롯하여 공주 무릉동으로 이주해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조한필 원장은 “이번 유물기증을 계기로 교동대동계에 대한 조사와 연구, 그리고 공주지역 고령박씨의 정착과 활동, 농기에 대한 정밀실측과 연구, 복원 등을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주 지역사를 밝히는데 힘쓰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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