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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부여 여행Ⅱ】아는 만큼 보이는 부여왕릉원

2022.07.12(화) 07:10:36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며칠 전, 공주무령왕릉과 왕릉원을 다녀왔는데요, 생각해 보니 그보다 먼저 갔다온 부여왕릉원을 소개하지 못하고 있어서 뒤늦게 소개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부여왕릉원

▲ 부여왕릉(부여군 부여읍 왕릉로 61/041-830-2890)은 사적 제14호이다.
 

부여왕릉원

▲ 부여왕릉원(扶餘王陵圓)


유네스코세계유산인 부여왕릉원은 무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백제 사비시대(538~660)의 왕릉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군은 중앙의 왕릉군 7기로 모두 왕과 왕족들의 분묘로 여겨지고 있으며, 백제 후기 묘제를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석실분이라고 합니다. 

나성과 능산리사지

▲ 부여나성(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67)과 능산리사지


부여왕릉원에서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사적 제58호인 부여나성과 능산리사지였습니다. 부여나성은 부여 동쪽에 있는 토성으로 백제 성왕(聖王, 523~554) 때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둘레 8 km의 방어시설이자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외곽성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부여나성의 밖으로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이전 시기의 왕릉과 달리 죽은 왕들의 무덤인 부여왕릉원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생(生)과 사(死)의 공간을 구분 짓는 경계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하네요.

사적 제434호인 부여능산리사지는 왕실 사찰인 '능사(陵寺)'가 있었던 곳으로 백제 왕실의 무덤 가까이 조성돼 있고, 목탑터에서 발견된 국보 '부여능산리사지석조사리감'에서 567년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임이 밝혀져, 왕족의 명복을 기원하던 곳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660년, 백제 멸망 후 능사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며, 1993년 12월에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었죠.

ICT아트뮤지움

▲ ICT아트뮤지움


부여나성과 능산리사지를 둘러보고 나서 가까운 거리에 자리한 '능산리고분군 ICT아트 뮤지움'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몰입형 360 시네마, 증강현실(AR), 홀로그램과 같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여의 백제 유산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백제 사비기의 대표적인 세 가지 돌방무덤 형태나 백제금동대향로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등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으나, 부여나성과 능사, 동하총 등의 사진 자료와 문화재 관련 일반 자료는 조도가 높은 곳에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모형관

▲ 부여왕릉원벽화고분모형
 

4.ICT아트 뮤지움 내부부여왕릉원벽화고분모형 내부


부여능산리사지와 ICT아트뮤지움 중간 지점에는 부여왕릉원벽화고분모형이 자리해 있었습니다. 비록 모형이었지만, 실제로 들여가보고 만져볼 수도 있어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백제 한성시대 고분

▲ 백제 한성시대 고분 모형 (자료 공주무령왕릉과 왕릉원 모형전시관)


최근에 다녀온 공주무령왕릉과 왕릉원의 모형전시관에는 백제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를 대표하는 고분에 대한 비교 설명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는데요, 백제 한성시대를 대표하는 고분은 석촌동 4호분과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이었습니다.

석촌동 4호분은 서울 송파구에 석촌동에 위치한 초기 백제고분군입니다. 돌무지무덤, 돌무지널무덤, 돌덧널무덤, 움무덤 등 다양한 무덤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은 연도가 달린 방형 또는 장방형 평면의 돌방무덤으로 초기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을 교체하여 한성시대 후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백제 웅진시대 고분 모형

▲ 백제 웅진시대 고분 모형의 단면 (자료 공주무령왕릉과 왕릉원 모형전시관)


백제 웅진기의 대표 고분은 벽돌무덤입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은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 교촌리 3호분 등 송산리와 교촌리고분군을 중심으로 웅진시기 공주지역에서만 한정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백제 사비시대 고분 모형

▲ 백제 사비시대 고분 모형의 단면 (자료 공주무령왕릉과 왕릉원 모형전시관)


백제 사비기를 대표하는 고분은 부여왕릉원벽화고분모형에서 본 것처럼 대형의 판석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만든 굴식돌방무덤으로 능산리 동하총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송산리 5호분처럼 깬돌을 쌓아 만든 송산리식 굴식돌방무덤과는 확연히 차이를 보여서 널방의 4벽면은 판석 1개씩을 사용하여 수직벽을 세우고, 천정도 1개의 커다란 판석을 덮어 완성하여 납작천장(平天障)식 돌방무덤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의자왕단

▲ 의자왕단 (왼쪽이 부여융의 단이고, 오른쪽이 의자왕의 단이다.)


부여왕릉원벽화고분모형에서 이동한 장소는 2000년에 조성된 의자왕단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의 가묘(초혼묘)로 의자왕과 부여융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의자왕의 단에는 주실과 전실로 구성된 석실을 두고, 목관에는 의자왕릉 추정지인 중국 낙양시 북망산에서 가져온 영토를 넣었다고 하네요. 부여융은 백제 멸망 후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사망했다는데, 낙양시 북망산에서 출토된 '부여융 묘지석'의 복제품을 기증받아 단에 매설하고 있다고 합니다.
의자왕단에는 의자왕의 생애를 적은 비가 세워져 있었는데요, 타국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은 패망국의 왕과 그 아들의 죽음에 숙연해져 잠시 읽어 보았습니다.

백제 31대 의자왕(義慈王)은 무왕(武王) 33년에 태자로 책봉(冊封)되었으며 성품은 부모를 효(孝)로써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있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는 칭송이 자자하였고, "용감하고 담대하며 즉위 후 유교정치사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국내를 순무(巡撫)하면서 사형수 외에는 모두 방면(放免)하여 민심 수습에 적극 나서 인덕정치(仁德政治)를 베풀었으며 신라의 40여개 성(城)을 일거에 함락시키는 전과와 신라의 옛 가야지역에 대한 통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점령하는 등 탁월한 군사적 재능이 있었고 외교에도 당(唐)과는 공존을 모색하고 왜(倭)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고구려와는 연화(連和)하여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등 국제관계의 흐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있는 감각을 지녔다. 그러나 의자왕은 재위, 15년에 이르러 정적(政敵)들이 제거되자 서자(庶子) 41명을 좌평(佐平)으로 임명하고 식읍(食邑)까지 내려주는 등 국내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660년 7월에 신라와 당 동맹군의 전격적인 침공을 받게 된다.(중략)

부여왕릉원 동하총

▲ 부여왕릉원 동하총


의자왕단에서 내려와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왕릉군 7기였습니다. 안으로 입장이 불가해 철책을 사이에 두고 일정 거리에서 볼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중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능산리 동하총이었습니다. 부여왕릉원벽화고분모형에서 본것처럼 널방의 동서남북 4면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연꽃과 구름이 흐르는 그림이 그려져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돌아보고 부여 여행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부여왕릉원의 발굴 조사는 계속되고 있다.

▲ 부여왕릉원의 발굴 조사는 계속되고 있다.


부여왕릉원과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비슷한 시기에 둘러보니, 백제 고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듯합니다. 백제 왕도인 공주와 부여의 왕릉원 두 곳을 돌아보고 나니, 이 두 곳은 사전에 정보와 지식을 쌓고서 방문하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보다 의미 있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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