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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당진 여행①] 내포 핫플레이스 '면천읍성'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기

2021.06.26(토) 23:28:00 | 엥선생 깡언니 (이메일주소:jhp1969@naver.com
               	jhp196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내포 지역에 위치한 당진(唐津)은 과거 신라시대에 당나라와 교역하던 항구가 있었던 데서 지명이 유래한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당진시의 전신인 당진군으로 합쳐지나, 조선시대에는 당진현, 면천군, 해미현, 홍주목, 아산현의 일부 등 여러 고을로 구성됐었다. 그중 면천군(沔川郡)은 백제시대에는 혜군이라 칭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혜성군으로 개명된 곳으로 면천군으로 개칭된 것은 1413년(조선 태종 13)에 이르러서다. 1913년에는 당진시에 편입된다.

면천읍성의 남문 옹성
▲ 면천읍성의 남문 문루에는 '원기루(遠奇樓)'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면천읍성 안내도
▲ 면천읍성 안내도

조선 초기 지방행정구역의 정비 및 왜구 등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면천군에 읍성 축조 논의가 시작됐다고 한다. 세종 21년(1439) 윤 2월 7일에 축성을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10일에 완성한 면천읍성은 인근 서산의 해미읍성보다 시급성이 부각되어 먼저 건립되었다.

면천읍성이 축조되기 이전 면천의 방어 거점은 산성이었다. 지금의 면천읍성 북쪽에 위치한 몽산(표고 295m)의 정상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산성은 축조가 쉽고 방어에 용이하나, 이동이 불편하고 생활에 제약이 많아 평지에 읍성을 짓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면천읍성은 행정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성내에 관아와 객사, 내아를 비롯한 부속 건물, 장청과 향청 등이 들어서 있었다. 조선 후기 읍성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에는 많은 민가가 들어오고, 저자가 나타났으며, 1872년의 고지도에는 면천읍성의 문루 등의 시설이 무너지고 퇴락하여 모두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면천읍성의 발굴과 정비는 2007년부터 시작됐으며, 2012년에 남문의 문루와 옹성이 복원되었다.

문루 위
▲ 옹성 위에서 문루를 바라본 전경

문루 측면에서 바라본 전경
▲ 읍성 안쪽에서 바라본 문루

측면에서 바라본 문루 전경
▲ 측면에서 바라본 문루 전경

둥근 항아리 모양으로 성문 앞을 막기 위해 성곽에 설치되는 시설물을 옹성(甕城)이라고 한다. 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다. 좁은 옹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적의 인원이 제한적이고, 문을 부수기 위한 긴 형태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공간적 여유가 없다 보니 수성하는 입장에서는 방어에 유리하다.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91호인 '면천읍성'은 둘레 약 1336m에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 치성 3개소가 확인됐다. 옹성은 남문에 축조되어 있으며, 면천읍성 남문만의 특징을 잘 간직한 소중한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관광자원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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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하게 쌓아올린 서벽(위)과 최근에 축조한 남벽
▲ 정교하게 쌓아올린 서벽(위)과 최근에 축조한 남벽(아래)

치성은 성벽의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은 성(城) 구조물의 일부를 말한다. 성벽보다 돌출되어 있어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가까이 쳐들어오는 적을 막을 수 있다.

최근에 복원한 남문과 달리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서문의 치성과 성벽의 자연석들은 사진(위)에서 보듯 정교하게 다듬어 축조했다. 그러나 문화재의 인식이 부족한 시기에 저수지 공사 등에 이 돌을 빼다 써서 유실된 곳이 많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치성과 서벽의 각성돌
▲ 서쪽 치성의 각자성돌

면천읍성의 건립을 위해 많은 지역에서 장정이 동원됐는데, 지역별로 부여된 구간의 성벽을 책임지고 시공하게 할 목적으로 연도와 축조구간, 책임 군현을 돌에 새겨놓았다. 이를 '각자성돌'이라 하는데, 오늘날의 '공사 실명제'에 해당하는 제도다.

서문 치성에서 확인한 각자성돌에는 '기미년옥천시면장육십척사촌(己未年沃川始面長六十尺四寸'이라고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세종 21년(1439) 충청북도 옥천현이 해당 구간부터 축성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척'과 '촌'은 길이의 단위이며 우리말로는 '자'와 '치'에 해당한다. 1척은 30cm가 조금 넘는 길이이며, 1촌은 3cm가 조금 더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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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벽의 각자성돌
▲ 서치성 왼쪽 성벽에 새겨진 각자성돌(위)과 풀이 자라서 잘 보이지 않은 서치성 끝 지점의 각자성돌(원 안)

면천읍성의 서치성 왼편 성벽과 서치성 끝 지점에서도 '각자성돌'이 확인된다. 왼쪽 서벽에는 '석성종면(石城終面)'이라고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석성은 충남 부여군 석성면으로 해당 지역에서 축성하고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풀이 무성하여 자세히 살피지 못했으나, 여타 자료에 의하면 서치성 끝 지점의 각자성돌에는 '기미년옥천종말(己未年沃川終末)'과 '기미년결성수공사십육척팔촌시면(己未年結城受工四十六尺八寸始面)'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충청북도 옥천의 공사 끝 지점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의 공사 첫 지점을 알려주는 성돌이다.

풍락루
▲ 풍락루

서문지의 모퉁이를 돌아 동쪽으로 걸으니, 2층 누각 형식의 팔작지붕 건축물이 보였다. 지금은 사라진 면천관아의 문루 '풍락루(豊樂樓)'다. 원래는 '반월루'라고 하였으며,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1852년 당시 면천 군수였던 이관영이 중수한 후 '풍락루'라 이름 짓고, 현판을 걸고 풍락루기를 남겼다고 한다.

'풍락루'는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명명한 것이라 한다. 붕괴될 위험이 있어 1943년 철거했다가 2007년 철거 전 사진을 토대로 복원했다.

면천 은행나무
▲ 면천은행나무는1990년 5월 24일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으며, 2016년 9월 6일에는 천연기념물 제551호로 지정되었다.

풍락루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면천초등학교 교사였던 건물이 나타났다. 면천읍성의 객사시설을 중심으로 주변 건물지, 축대, 누각 등이 확인되어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천연기념물 제551호인 '면천은행나무(沔川銀杏나무)' 두 그루가 위용을 과시하며 서 있다.

두 그루의 면천은행나무 수령은 약 1100년으로 알려졌으며, 면천두견주(沔川杜鵑酒)와 함께 면천의 명물로 손꼽힌다. 학교 운동장 안쪽에 서 있는 나무는 밑줄기가 썩어 커다란 구멍이 있었으나, 치료 후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들은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卜智謙)'과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는데, 안내문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복지겸이 면천에 귀향하여 병을 얻어 앓고 있었는데, 모든 약이 효과가 없었다. 그의 딸이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해달라고 아미산에 올라가 백일기도를 드렸더니, 신령이 나타나 아미산의 진달래꽃과 안샘물로 술을 빚어 드리고 집 앞에 은행나무를 심고 정성을 들이면 나을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행하였더니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3.10면천학생독립운동기념비
▲ 3.10 면천학생독립운동기념비

면천(읍)성은 당진의병이 1906년 5월 10일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의병장 '최구현'은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거병하여 면천성을 공격하나 일본군의 신식 군대에 막혀 8월 24일 붙잡혀 희생된 인물이다.

면천의 원용은, 이종원, 박창신 선생 등은 옛 면천 객사에 자리 잡은 면천보통학교의 학생들이었다.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직접 보고 돌아와 3월 10일, 면천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어른들의 도움 없이 이뤄진 이 지역 최초의 학생만세운동이라고 한다. 잠시 3·10 면천학생독립운동기념비 앞에서 이 지역의 항일운동사도 짚어보았다.

군자정
▲ 군자정은 면천초등학교 동쪽에 있는 군자지(君子池)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3·10 면천학생독립운동기념비 오른편에는 군자정(君子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숙종 45년(1719) 복지겸의 후손인 복지구가 중수한 후 1803년에 새로 건립했다는 중수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정자는 1994년 복원사업 때 다시 지은 것이다.

군자정 뒤로는 복지겸의 딸, 영랑(影浪)의 효심을 기리기 위한 '영랑효공원'이 위치해 있다.

100년 전 우체국 건물
▲ 100년 전 우체국 건물로 현재는 카페가 들어와 있다.

일본식 건축 형태가 남아 있는 방앗간
▲ 일본식 건축 형태가 남아 있는 방앗간은 영업 중이다.

오래된 미래 책방과 진달래상회
▲ 오래된 미래 책방과 진달래상회

면천읍성의 복원사업은 성안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시키지 않고 진행되어 근대문화를 즐길 수 있는 보고였다. 100년 전 우체국으로 사용됐던 건물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었고, 일본식 건축 형태가 그대로 남은 방앗간은 아직도 영업 중이었다. 레트로 감성으로 충만한 '오래된 미래 책방, 진달래상회, 그 미술관' 등도 꼭 들러볼 곳으로 추천한다.

읍성 안에는 날이 더워지면서 콩국수를 간판 메뉴로 내놓는 식당들이 많았다. 오래된 방앗간 인근에 '원조'를 붙인 콩국수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쑥을 넣어 뽑은 면발에 서리태로 낸 진한 국물 위에 콩가루를 올려서 차려낸 콩국수를 먹고, 느리게 걸으며 즐긴 당진에서의 오전 여행을 갈무리했다.

[참고 자료]

-디지털당진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향토문화전자대전
-두산백과

[당진면천읍성]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 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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