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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논산 윤황선생고택에서 역사의 향기를 만나다

기호유학의 중심 충남 논산에서 만나는 역사 유적

2021.05.06(목) 10:51:14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계룡도령 춘월이 소개하려는 논산 윤황선생고택은 충청남도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택으로 윤황선생의 6대 손이며 함안 현감을 지낸 바 있는 윤정진이 조선 영조 때인 1730년 경 지금 자리로 옮겨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대로 윤황 선생 종가로 사용되어 오고 있답니다.

논산윤황선생고택에서역사의향기를만나다 1

사실 충남 논산은 우리나라 조선 500년을 이어 온 유학의 영남유학과 더불어 양대 산맥인 기호유학의 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러다 보니 논산의 이곳저곳에는 당대의 유학자들의 자취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 그중 조선 후기의 학자요 정치가에 사상가이며 서인, 소론의 영수인 백의정승 명재(明齋) 윤증 선생의 할아버지로 선조 때 태어나 광해군 시대를 지나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얻은 인조 17년(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며 사후에 영의정까지 추증된 문정공 팔송 윤황선생고택으로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장마루로716번길 132(장구리 52)에 위치하고 있으며 팔송 '윤황선생고택'으로 이름 붙여져 있답니다.

논산윤황선생고택에서역사의향기를만나다 2

내부는 이렇게 되어있으며 좌우에 자리한 방은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전기로 난방을 하는 등 편리를 도모햇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을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논산윤황선생고택에서역사의향기를만나다 3

팔송 윤황선생고택에는 모두 4동의 건물, 안채, 사랑채, 아래채, 제일 높은 곳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문정공 팔송윤황선생은 불천위제사(不?位祭祀-사대봉사가 원칙이나 4대를 넘긴 신주神主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면서 지내는 제사로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자격을 부여받은 신위를 대상으로 지내는 것)를 받는답니다.

논산윤황선생고택에서역사의향기를만나다 4

사당에는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제일 왼쪽에 문정공 팔송 윤황선생의 신위를 매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이곳에 대청으로 모셔 지낸답니다.

논산윤황선생고택에서역사의향기를만나다 5

사당 아래 위치한 안채의 모습으로 정지간과 툇마루를 따라 이어진 대청마루와 방이 이어지는'ㄱ'형태의 건축물로 가운데의 대청에서 문정공 팔송 윤황선생을 기리는 불천위제사가 모신답니다.

논산윤황선생고택에서역사의향기를만나다 6

2017년 11월 17일 새벽 대청마루에서 문정공 팔송 윤황선생의 불천위제사를 지내는 모습인데요.
11월이었지만 이날 새벽에 얼마나 추웠는지 마루가 꽁꽁 얼어있는 상태라 신을 신지 않은 맨발을 디딜 곳이 없어 고생한 기억이 납니다.
묵묵히 제례를 올리는 후손들을 보며 얼마나 힘들까? 걱정을 하기도 했었답니다.
ㅎㅎㅎ

논산윤황선생고택에서역사의향기를만나다 7

안채의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있는데요.
지금은 그저 광으로 사용하는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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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이 살지는 않지만 제사나 문중 행사 때 사용하는 때문인지 대문에는 후손의 문패가 붙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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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 윤씨의 노성 입향과 노종파 오방파의 탄생]파평윤씨 노종파는 효정군 윤돈(尹暾, 1519~1577)의 노성 입향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윤돈은 여회 윤선지(尹先智)의 3형제 중 둘째아들입니다.
형과 아우는 경기도 파주에서 살았지만 윤돈은 임진왜란 이전에 일상적이던 처가가 있는 니산현(尼山縣) 득윤면(得尹面) 당후촌(塘後村)으로 내려와 살게 되는데 시기를 1540~1550년대로 보고 있습니다.

윤돈이 처가가 있는 노성에 정착하면서 처가 덕분에 경제적으로 기반은 다지게 되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파평윤씨 노종파가 오랜 벼슬을 하면서 부정 축재를 한 것은 아닌가 오해를 하지만 사실 처가로부터 상속받은 전답 174마지기와 노비 17구, 그 후 자손이 없던 류서봉(柳瑞鳳)의 처 이씨가 흥백 윤창세의 막내아들 희(熺)를 지목하여 재산을 물려주고 외손봉사(外孫奉祀 - 직계 비속이 없어 외손이 대신 제사를 모시게 하는 것)를 부탁하면서 그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류연과 류서봉에 대한 외손봉사는 1840년 노종파 대종회에서 대종중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여 노성의 병사 뒤 묘역에 모시고 현재까지 지금도 대종중에서 지내고 있답니다.

계룡도령 춘월은 2017년 병사에서 진행된 세일사에서 별도의 상을 차리고 제사를 올리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그렇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지역에서 기반을 닦은 파평 윤씨 노종파는 대부분 청렴 결백하게 지낸 듯합니다.
특히, 백의정승 명재 윤증선생을 보면 후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듯 보입니다.
거기다 더해서 효정군 윤돈의 아들 흥백 윤창세(尹昌世, 1543~1593)는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3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많은 요직을 지낸 명종조의 중신 청주경씨 경혼(慶渾, 1498~1568)의 딸과 혼인하고 처가의 재산 기반이 있는 현재의 병사리 비봉산 자락으로 터전을 옮겼다고 하며 경혼의 아들, 손자, 현손 등도 대대로 과거에 합격하여 명문의 위상을 이어갔으며 청주경씨의 재산 상속분도 상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처럼 파평윤문(尹門)이 병사리에 입향하여 노종파로 단기간에 명문 집안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윤돈의 처가인 문화류씨가와 윤창세의 처가인 청주경씨의 가문 배경·경제적 기반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여기에 더하여 윤창세의 처 청주경씨는 출중한 가정 운영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인데요.
청주경씨는 명문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나 부모님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고 윤창세에게 시집을 가서 5남 2녀를 두었으며 1593년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윤창세보다 31년을 더 살면서 7남매를 모두 결혼시키고, 오방파의 학문이 대성하는 기반을 마련한 뒤 서울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손자 윤순거(尹舜擧, 1596~1668)는 경씨부인의 행장(行狀)에서 “경씨부인은 ‘군자의 기품을 지닌 여인’으로 불렸고, 지혜가 밝고 사리에 통달하였다.”고 술회하였답니다.

파평윤씨는 자손이 번성하여 거자(擧字) 항렬에서는 21명(1명 계거는 장단종중으로 출계), 재방변(?) 항렬은 51명, 교자(敎字) 항렬은 106명, 동자(東字) 항렬은 173명, 광자(光字) 항렬은 307명으로 번성하였고, 거주지도 장구동면 유봉·가시라·장구리·죽림리로·거자 항렬부터는 공주·진잠·부여 등지로 확대하여 갔으며 파평윤씨의 노성 입향조인 윤돈 이하의 자손을 칭할 때는 ‘노종파(魯宗派)’라 하고, 창세의 아들 5형제 자손을 일컬을 때는 ‘오방파(五房派)’라 하는데 살펴보자면 경씨부인은 윤창세의 아들 첫째 설봉공파를 이룬 윤수(尹燧), 둘째 문정공파 윤황(尹煌), 셋째 충헌공파 윤전(尹O), 넷째 서윤공파 윤흡, 다섯째 전부공파를 이룬 윤희(尹熺)로 윤창세의 5형제 계파를 ‘오방파’라고 부르는데 파평윤씨 오방파가 학문으로 대성할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 기반은 물론 가정 운영의 기초를 마련해 준 여인이랍니다.
당시 아들과 손자들은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 주로 성남 집에서 거주하며 학문에 힘썼는데 1599년경 청주경씨는 장남 윤수의 적자가 없자 순거를 종사(宗嗣)로 지목하였고, 순거는 18세가 되어 병사에서 지내면서 종손 역할을 하였습니다.

논산윤황선생고택에서역사의향기를만나다 10

목조주택의 경우 화재가 발생하면 재빨리 불을 꺼야 하니 바로 근처에 이렇게 방화수로 이용하는 연못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조 때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냈고 탄핵을 받아 유배되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윤황선생의 호가 팔송인 이유는 그가 살던 곳이 한양의 남별영이 있던 곳으로 주변을 소나무 8그루가 둘러싸여 있고 그 가운데 샘이 있어 팔송정이라고 불렀다는데 그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고, 거꾸로 중구 필동 2가 남별영 서문 밖의 팔송(八松) 윤황(尹煌) 집에 딸려 있던 있던 우물이 팔송 윤황의 호를 따서 팔송정이라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무엇이 맞는지는 현재로서 알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

윤황 선생 고택과 가까운 거리에 논산 윤황 선생 재실과 파평 윤 씨 노종파 재실인 병사와 파평 윤 씨 노종파 오방파의 아버지인 윤창세와 처가의 묘소가 있는 윤창세 묘소 그리고 종학당이 자리하고 있으니 남의 집을 방문할 대 지켜야 하는 예절을 갖추고 방문하면 되며 입장료나 관람료 없이 충분한 주차공간이 있으니 방문하여 역사의 향기를 즐겨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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