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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보령 세 곳의 향교에서 만나는 조선시대 학교의 모습

예와 효의 가르침으로 백성의 교화를 책임졌던 향교

2021.03.24(수) 00:53:49 | 보라공주 (이메일주소:eyeful3535@naver.com
               	eyeful3535@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크게 관학과 사학으로 나뉘는데, 관학의 대표적인 기관이 향교입니다.
지방문화의 중심지였던 향교는 유교사상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지방민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중등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나라에서 관리하던 공교육 기관이며, 지방에 파견된 수령이 일차적 책임을 지도록 하였습니다. 
향교는 소학과 효경, 사서오경, 향약을 중심으로 기본예절과 효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백성의 교화를 우선시하여 관리 등용에 치중하던 성균관과 달리 유교 문화를 알리고, 실천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현재 지역에 남아있는 향교는 교육적인 역할은 사라지고, 공자와 성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역할만 해오고 있습니다.
조선 왕조는 백성을 교화하고 유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적으로 1읍 1교 설립을 원칙으로 삼고, 중앙 관료인 수령을 파견함으로써 중앙 집권제를 펼치게 됩니다.
그 결과 보령군에는 3곳의 향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1914년 보령군으로 통합이 되기 전 보령군, 남포군, 오천군으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령군에 위치한 향교 세 곳 중 남포향교가 1413년(태종)에 처음 설립되었고, 두 번째는 1721년(경종)에 보령향교가 세워졌습니다.
이후 1901년 오천군이 생기면서 1905년(고종)에 전국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오천 향교가 설립되게 됩니다. 
보령에 가장 처음 설립된 남포향교는 웅천읍 대천리에 세워졌다가, 남포지역에서 여러번 이전을 하였고, 1843년(현종)에 지금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남포 읍성에 둘러싸여 있는 남포향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11호로 지정된 곳으로 시골 마을 끝에 위치해 있습니다.
선명한 필체로 쓰인 하마비를 지나면 홍살문과 남포향교 표지석이 나오고, 키 큰 은행나무 뒤로 위엄 있는 외삼문이 보입니다. 

보령세곳의향교에서만나는조선시대학교의모습 1▲남포향교 하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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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향교 홍살문과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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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가 서있는 남포향교 외삼문

외삼문 왼쪽이 향교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바로 뒤에는 교육 공간이었던 명륜당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우물이 있는 곳 뒤로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있습니다.
보통 동재와 서재로 나뉘어 기숙사로 이용하는데, 남포향교는 서재 하나의 공간뿐입니다.

보령세곳의향교에서만나는조선시대학교의모습 4

▲남포향교 명륜당과 서재

더 안쪽에는 내삼문이 나오고 역시 왼쪽 문으로 들어가면 대성전이 나옵니다. 전형적인 전학후묘로 배치되어 있고, 공자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대성전 뒤로 병풍처럼 길게 뻗은 성주산과 옥마산의 멋진 산줄기가 펼쳐져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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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향교 내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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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산과 옥마산으로 둘러싸인 남포향교 대성전

두 번째로 세워진 보령 향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령군의 행정중심지역으로 지금도 보령 읍성 성곽과 함께 남아있습니다.
보령 1리 경로당을 지나면 멋진 벽화가 그려진 마을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마비는 최근에 세워진 듯하고, 홍살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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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리 마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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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세워진 듯한 보령향교 하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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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향교 홍살문

마을 초입에서 한참 걸어가다 보면 벽마다 향교에 얽힌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심심치 않습니다.
보령향교 바로 옆에는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유림회관이 있고, 다른 곳보다 규모가 커 보이는 외삼문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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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향교 앞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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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향교 유림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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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향교 외삼문

외삼문 뒤로는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다른 향교보다 큰 규모임을 알려주듯 동재와 서재가 나뉘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숙사와 서재의 기능을 했던 서재는 5칸으로 나누어져 있고, 동재는 4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동재 옆에는 아궁이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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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향교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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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향교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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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향교 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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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에 딸린 아궁이

명륜당과 동재 사이 작은 문을 통과하면 내삼문이 나옵니다. 내삼문 역시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보령향교 역시 전학후묘로 배치되어 대성전이 명륜당 뒤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앙과 좌우에 돌계단을 쌓아 오를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내부는 봄과 가을에 있는 석전대제 때나 만나 볼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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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향교 내삼문으로 나가는 작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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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향교 내삼문 뒤 대성전

이제 보령의 마지막 향교, 오천향교입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이 된 오천향교는 다른 향교와 달리 대성전만이 설립되어있습니다.
향교로 가는 초입에 유래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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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향교 유래석

그 이유는 1895년 조선시대 충청수군절도사영이 폐영되었다가 1901년 오천군이 새로 생기면서 마을 유림들이 향교를 만들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1905년 토지를 기증받고 유림과 보령시의 노력으로 제를 지낼 수 있는 대성전을 완공했다고 합니다.
문이 닫혀있기는 했지만 소박한 외대문 뒤로 바로 대성전이 보여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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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향교 소박한 외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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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향교 제사를 준비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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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문 뒤로 바로 보이는 오천향교 대성전

조선 초기 불교를 대신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관학 교육기관인 향교가 많이 설립이 되었지만 현재 문화재로 남아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중 보령의 향교 세 곳은 같은 지역에 있지만 설립된 시대에 따라 명륜당, 동재, 서재, 대성전 등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 조용히 둘러볼 수 있는 문화재를 찾아 역사를 보는 안목을 키워보시기 바랍니다.  

남포향교
충남 보령시 남포면 읍성향교길 133 (옥동리 9)

보령향교
충남 보령시 주포면 향교말길 45 (보령리 47-1)

오천향교
충남 보령시 오천면 향교길 45-26 (교성리 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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