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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만인에게 덕이 돌아가는 다리, 만덕교

2020.12.20(일) 19:45:15 | 충화댁 (이메일주소:och0290@hanmail.net
               	och0290@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부여군 홍산 여행은 만덕교부터 건너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만인에게 덕이 돌아가는 다리’라는 다소 예스러운 티가 팍팍 나는 이름에 비해서 뜻은 거창한 다리가 홍산의 관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홍산에 들어서면 그 만덕교가 안 보인다. 홍산의 입구에 이르렀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홍산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모른다고 했다.
     만인에게덕이돌아가는다리만덕교 1
  
옛 문화재 중에서 다리만큼 대접을 못 받는 문화재도 없을 것이다. 자동차 문화가 발달하고 도심 외곽으로 도로가 나면서 옛 다리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다리 그 자체의 문화재적 가치는 주목받기도 하지만 장애물을 편리하게 건너는 기능적인 가치는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에 그런 식으로 도시의 한구석에 방치되거나 미적 가치로만 평가되어 관광지로서의 기능만 남은 된 옛 다리들이 많다.
 
만인에게덕이돌아가는다리만덕교 2
 
부여군 홍산면의 만덕교도 그런 다리 중 하나이다. 조선 숙종 7년(1681년)에 홍산천에 다리를 건설하게 된다. 만덕교도 처음에는 견고하면서도 멋을 부려서 무지개다리(홍예) 같은 곡선과 난간이 있는 아름다운 다리였다.

그 시절에도 다리의 기능성과 예술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돌을 재료로 장애물이 있는 곳에 다리를 놓는 기술력은 정림사지 5층석탑을 비롯한 금동대향로 등의 걸작을 만들어낸 백제인의 후예이기에 가능했다.
 
만인에게덕이돌아가는다리만덕교 3
 
종종 옛 선조들이 만들어낸 문화재들 앞에 서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런 작품을 만들었던 시기에는 인간성과 신성(神性)이 반반이었던 반신반인(半神半人)의 경지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기계와 동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반신반인(半神半人)에서 신성이 사라지게 된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당시의 만덕교는 부여에서 내산면과 서천, 임천면 방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건너야 하는 다리였다. 오늘날 같은 쓰임새로 말하면 백마강에 놓인 백제교 이상의 다리였다. 만덕교 설립비에는 당시 만덕교를 놓을 때 감독을 했던 첨지 서덕해라는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그 밖에 자재를 희사하거나 만덕교 건설에 직접 참여한 기술자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만인에게덕이돌아가는다리만덕교 4
  
우리나라 문화재들 중에는 조성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다리 조성비에는 화주들과 조성자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 숭유억불의 세월이었지만 민초들은 여전히 불교를 신봉했다. 전생의 업장을 소멸하는데 가장 큰 공덕이라는 다리를 놓는 공덕인 월천공덕을 실현했음을 인증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만인에게덕이돌아가는다리만덕교 5
 
돌다리로 아무리 견고하게 건설했다고 해도 지난 200여 년간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고 천재지변을 겪다보면 만덕교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고종 때인 1869년 홍수 피해로 부서진 만덕교를 다시 보수했다. 이때 무지개다리였던 만덕교는 현재와 같은 널다리가 되었다. 다리 상판의 디딤돌은 반듯한 우물마루형으로 목재를 끼워 맞추듯이 깐깐하게 짜 넣었다. 변변한 동력도 없이 오로지 망치와 정으로 돌을 다듬어 냇물에 다리를 놓는 일이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동력이 소요되는 일이다. 그 어렵고 험한 일을 우리 선인들은 해냈다.
 
만인에게덕이돌아가는다리만덕교 6
 
그것도 예술성을 살려 멋을 부리고 한 치의 오차 없이 정교하게 다리를 건설했다. 그러나 다리의 경우 사람들이 항상 밟고 지나다니는 무게를 감당해야 했기에 보수할 일도 많았고 홍수에 냇물이 불어나면 떠내려가는 일도 잦았다. 한마디로 관리가 어려운 것이 다리이다.

아무리 견고하게 잘 만들어도 천재지변을 피해갈 수는 없어서인지, 아니면 만인에게 덕이 돌아가는 월천공덕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어서인지 만덕교는 그 역할의 운명을 다한 것처럼 배수 펌프장 뒤에 방치되어 있다. 만덕교 옆에 있어야할 만덕교 개건비는 홍산객사 안에 따로 서 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원래 만덕교 옆에 있던 만덕교 개건비는 홍수에 다리가 부서지면서 홍산초등학교 안으로 옮겼다가 객사 안으로 다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했다.
 
홍산 객사. 만덕교는 홍산 입구에 만덕교 비는 홍산 객사 안에 따로 서 있다.
▲홍산객사, 만덕교는 홍산 입구에 만덕교 비는 홍산객사 안에 따로 서 있다
 
만덕교 비를 원래 자리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가 똑같은 피해가 날 것을 우려해서 안전한 자리를 찾아서 옮겨놓은 것이라고 추측을 해보지만 만덕교 비는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몸통인 만덕교는 한 급수 아래인 부여군 향토유적 제54호로 지정된 것은 문화재 관리 당국의 성의부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만인에게덕이돌아가는다리만덕교 7
 
몇년 전까지만 해도 만덕교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민망할 정도로 만덕교의 관리 실태는 엉망이었다. 홍산 배수펌프장으로 주변 경관이 막혀 있는 것도 아쉬운데, 울타리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어서 남의 집 울타리 기웃거리듯이 구경을 해야 했다. 다행히 현재는 만덕교 뒤쪽의 건물들을 철거하고 잔디를 심어 관리하면서 주차장도 확보해 놓았다. 홍산 사람들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고 고향 문화에 대한 애향심이 높아진 결과였다.

홍산 외곽으로 도로가 잘 발달하는 바람에 만덕교의 위상이 초라해졌지만 홍산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30여 년 전에도 만덕교를 건너서 홍산국민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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