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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공주 소학동 혈저천에 흐르는 효자 향덕의 이야기

소학동 효자향덕비와 국고개 효심공원

2020.10.10(토) 18:20:53 | 대로 (이메일주소:dried@naver.com
               	dried@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길쌈하는 어머니 무릎에 누워 듣던 옛날 이야기 가운데 유독 효자·효녀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병든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겨울철에 딸기를 찾아 나섰다가 효심에 감복한 신령이 나타나 싱싱한 딸기를 주어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는 그래도 수긍이 갔지만, 자기의 살을 베어서 삶아 부모님께 드렸다는 이야기 같은 건 믿기기는커녕 차마 상상하기조차 무섭고 끔찍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주시에 그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 있고, 실제로 그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세워주었다는 곳이 있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공주소학동혈저천에흐르는효자향덕의이야기 1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 천안논산간 23번 국도 차령로에서 소학동길로 빠지면 소학동 마을 앞에는 효자향덕비를 모신 정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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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잘 정리된 잔디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비각이 바로 효자향덕비 정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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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효자 향덕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나라에서 정려를 세우고, 그 비와 정려를 충청남도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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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덕은 통일신라의 제35대 경덕왕 때 사람으로 그 효행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동국삼강행실도 등에도 소개될 만큼 효심이 지극하였다고 합니다.
 
경덕왕 시절 천재지변이 심하여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겹쳐서 죽어나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 시절 향덕의 부모도 역시 굶주리고 병이 났으며, 어머니는 등에 종기가 나서 죽게 되어 향덕이 밤낮으로 옷도 벗지 못한 채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으나, 먹을 것이 없어 부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이를 끓여 드시게 하고, 어머니의 등창은 입으로 고름을 빨아 내어 회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향덕의 효행은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까지 전승되었고 영조 17년인 1741년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조영국이 글을 새겨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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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각 안에는 '신라효자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旌閭)'라고 쓰여진 비석이 서 있습니다. 이 비석은 팔각대석 위에 높이 160cm의 크기로 세워져 있는데, 비면에는 관찰사 조영국이 쓴 글이 한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극해라 효자여, 떳떳한 마음으로 온전함을 이뤘으니, 이미 다리살을 베었는데도 다시 종기를 빨았도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땅을 내리고 집을 내리셨도다. 마을이 효자로서 이름 났으니 영원토록 계속될지라'

그리고 그 옆에는 상단부가 파손·유실되어 하단부에 '지려'와 '삼월일중립'이라는 글자만 남아 있는 비석이 있습니다. 이 비석은 형태와 형상 등 여러 면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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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향덕비 앞에는 500살을 넘긴 느티나무가 비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노쇠해서 철지팡이를 여러 개 짚고 있고, 수술한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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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노쇠하다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가지마다 무수히 많은 잎을 피우며 청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부디 오랫동안 울울창창하여 효자 향덕의 높은 뜻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다해 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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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소학동 마을 앞에는 혈저천이라는 냇물이 흐릅니다. 효자 향덕은 이곳에서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냈으며,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느라 상처가 나서 피가 철철 흘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냇물이 핏물이 되어 흐르곤 하였다 하는군요. 그후 사람들은 이 냇물을 '혈흔천' 또는 '혈저천'이라 불렀다고 하네요.
 
이와 무관하게 일설에는 동학운동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피가 냇물을 붉게 물들여서 혈저천(혈흔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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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혈저천은 무심한 백로가 먹이를 사냥하고 있는 그냥 평범한 냇물에 불과해 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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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국고개라는 곳에 가면 효심공원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효자 이복과 향덕을 기리는 각종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중에는 효자향덕비의 모사본이 세워져 있어서 소학동의 효자향덕비와 비교가 됩니다.
 
효심공원의 효자향덕비는 최근에 세워져서 무척 깨끗해 보이는군요. 그런데 그 크기와 모양, 안에 들어 있는 비석은 완전히 똑같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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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고개 효심공원에는 효자향덕비 외에도 효자이복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복은 고려시대 향리 신분으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눈먼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주 가난하게 살았지만 효성이 지극했다고 합니다. 효자 이복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남의 집 일을 해 주고 국 한 그릇을 얻어 어머니께 드리려고 고개를 넘어가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국을 엎게 되자 슬피 울었다고 해요. 그 모습을 형상화해 놓은 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효행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복이 국을 엎은 것에서 이 고개의 이름을 국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네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지만 자식들의 효심은 옛날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효자 향덕이나 이복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부모님을 잊지 않고 늘 찾아 뵙고 안부를 전하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은 키운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효는 대물림을 한다고 합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를 할 때 자식들도 따라서 나에게 효도를 할 것입니다. 지극정성으로 부모를 모시고 공경하면, 내 자녀들도 당연히 본받을 것이지만 내가 불효를 하면 자식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지, 효심공원과 효자향덕비를 돌아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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